검은 고독 흰 고독 / 라인홀트 메스너 / 김영도 옮김 / 이레
나는 하산하기로 결심했음에도 한편으로는 계속 오를 생각을, 그것도 더 높이 오를 생각을 하고 있었다. ... 움직이기 위해서는 우선 스스로를 납득시켜야만 했다. ... 이것은 고독을 이기지 못하는데서 오는 불안과 자신의 일을 해결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불안이다. 나는 불안과 열망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 이 일을 해내기에 나는 너무나도 마음의 균형을 잃고 있다. ... 나를 무기력하게 만든 것은 열망의 상실이 아니다. 그것은 하릴없이 기다리는 데서 오는 고독에 대한 불안 때문이다.
"티케" 나는 대꾸하고 아이들과 함께 어울렸다. 포터들이 피워 놓은 모닥불을 함께 쬐며 나는 운명에 모든 것을 맡긴 그들의 고요한 영혼을 느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강했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일의 인과관계를 일일이 따지지 않는다. 이에 반해 사실에 대한 나의 감각이나 논리적인 사고력 따위가 뭐란 말인가.
1년 전의 나는 온갖 일에 머리를 쓰며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추한 대로, 광기 어린 대로, 운명의 장난 그대로 살기로 했다. 내가 애써 생각하지 않아도 온갖 의문에 대답해 주는 단순 명확한 일이 세상에는 흔히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걱정하고 괴로워한다. 나는 이러한 짐을 떨쳐 버리고 낭가파르바트로 떠나려는 것이다.
인간은 홀로 삶을 짊어지고 갈 때 오직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다. 또한 결단을 내릴 수 있고 그에 대해 완전한 책임을 질 수 있게 된다.
고독이란 마음속에서 생겨나는 것이지 외부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다.
기술적인 보조 수단은 끝까지 불가능한 것과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을 구분치 않고 해결해 버리기 때문에 모든 긴장감이 손상되고 맙니다. ... 어떤 일이든 혼자 해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싶고 혼자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고 싶은 거야. ... 그 무렵 나는 여러 가지를 우쉬에게 투영하고 그녀에게 의지했어. 이 의타심 때문에 나는 스스로 박차고 앞으로 나아갈 힘이 없었어. 순수하게 자신을 지키거나 내 길을 걸어갈 만한 힘이 없었던 거야. ... 진정한 나 자신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그리고 완전한 나 자신이 되기 위해서도 ... 지금도 나는 어떤 일의 의미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산에 올라 처음으로 나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하기 시작했거든.
나는 여기 쌓여 있는 눈과 바위와 구름의 감정을 함께 가지고 있다. 더 이상 철학이 필요 없다. 이곳에서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죽음까지도 이해하게 되니까. 나는 산을 정복하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니다. 또 영웅이 되어 돌아가기 위해서도 아니다. 나는 두려움을 통해서 이 세계를 새롭게 알고 싶고 느끼고 싶다. 물론 지금은 혼자 있는 것도 두렵지않다. 이 높은 곳에서는 아무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나를 지탱해 준다. 고독이 더 이상 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고독 속에서 분명 나는 새로운 자신을 얻게 되었다. 고독이 정녕 이토록 달라질 수 있단 말인가. 지난날 그렇게도 슬프던 이별이 이제는 눈부신 자유를 뜻한다는 걸 알았다. 그것은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체험한 흰 고독이었다. 이제 고독은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닌 나의 힘이다.
저 아래 어디인가에서 빙벽이 반쯤 떨어져 나간 것이 틀림없었다. 이곳에서는 마치 모든 것이 살아 움직이고 있는 듯했다.
나는 주위를 한 바퀴 돌며 다시 둘러보았다. 내가 가장 높은 곳에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에베레스트에 올랐을 때만큼 그렇게 강한 감정의 폭발은 이번에는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마음이 아주 고요했다.
갑자기 지난날의 일들이 바람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모든 것이 언젠가는 끝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별로 슬프지 않았다. 세상이 나를 들이마셨다가 토해내며 들끓고 소용돌이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전 다섯 시에 텐트를 나와 내 모든 운명을 걸어 보기로 했다. 식량도 모두 버리기로 했다. 수프까지 모두. 오늘 안으로 베이스캠프까지 도착하려면 강행군을 해야만 한다. 가장 비탈진 직선 루트를 따라서 고도 3,000미터를 내려가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못하면 나는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숨을 내쉴 때마다 속에서 무엇인가 떨어져 나가는 듯한 소리가 났다. ... 내 동작은 느리고 빙하는 거대해서 머릿속에서 거리 감각이 사라졌다. 그러나 내가 지금 혼자 있다는 것, 자기 자신의 능력밖에 믿을 수 없다는 것이 강하게 마음을 붙들었다.
어떤 일이든 완전히 혼자 힘으로 해내겠다는, 마지막까지 혼자서 해내겠다는,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다는 그러한 갈망은 낭가파르바트 단독 등반을 마친 후 더 강해졌다. 이것은 모든 능력을 가지고 싶다든가 어떤 일이건 반드시 해내겠다든가 하는 욕구라기보다는 오히려 스스로 완전히 홀로 서고자하는 강한 열망이었다. 나는 내 안에서 안식을 찾고 그 안에 있고 싶었다. 나는 때때로 명상에 잠기곤 했는데, 수수께끼로 가득한 이 세상의 모든 신비가 내 안에 있다는 - 모든 비밀에 대한 물음과 대답이 내게 있다는 - 생각이 마음속 깊이 자리 잡았다. 다시 말해서 내 안에 삶과 죽음의 시작과 끝이 함께 있는 것같이 느껴졌다.
혼자 걷고 있으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 나를 둘러싼 세계가 내 속에 들어왔다가 또 나간다. 눈앞에 펼쳐진 모든 풍경이 내 안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대지와 내 머리에서 나오는 소리의 화음이다. ... 머리에 들어 있는 지식이란 피상적일 때가 많다. ...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몸에 집중하며 이렇게 혼자서 걸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것은 자를 사용하지 않고 발과 눈으로 거리를 재는 것과 같다. 바로 여기야말로 내가 살 곳이라 여겨진다. 이곳은 나를 구속하는 것도 없고 고통스러운 과거도 없다. 어딜 가든 내 집이다. 반대로 어디에도 내 집이 없다는 것은 매력적이다.
재작년인가 그 전쯤에 경향신문의 <책읽는 경향>을 통해서 알게된 <그래도, 후회는 없다>를 읽고 나서
에베레스트에 대한 관심, 높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계속 마음속에 남아있었던 차에,
작년 말쯤 마찬가지로 경향신문의 <책읽는 경향>에 소개된 이 책을 사보게 되었다.
8,000미터가 넘는 곳은 어떤 풍경일까도 궁금하지만,
그 곳을 찾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를 더 궁금해했던거 같다.
1970년 동생과의 낭가파르바트 등반에서 동생을 잃고, 1977년 혼자서 다시 그곳을 찾아가는 라인홀트 메스너.
대규모 원정대가 아닌, 다른 사람이나 기술의 도움 없이,
진정한 자신을 찾아 홀로 산을 오르는 사람의 깊은 고독과 두려움을 그대로 보여주는...
그 과정에서 자연과 하나가 되어가는 모습이 담백하게 그려진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나와 나에게 돌아옴'을 체험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이 책을 읽고, 좀 바뀐 생각은...
산을 올라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시 내려오는 것 또한 등반의 하나의 과정임을 알게되면서
에베레스트에 올라보고 싶다는 생각은 조금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상황이 되어,
우리나라에 있는 산이라도 제대로 올라보자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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