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만 보는 바보 : 이덕무와 그의 벗들 이야기 (진경문고) / 안소영 지음 / 강남미 그림 / 보림
나는 사실로 문살을 반듯하게 짠 다음 상상으로 만든 은은한 창호지를 그 위에 덧붙여 문을 내 보았습니다. 이 문을 통해 햇살도 드나들고, 바람도 드나들고, 옛사람과 우리의 마음도 서로 드나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머리말 중
아버님께 퇴궐 인사를 드리고서는 바로 나의 작은 서재로 향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건만 등촉이 방을 환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 보였다. 책 속에 묻혀 사느라 늘 침침한 내 눈을 염려하는 아들의 마음이 먼저 다녀간 것이리라. 종묘 부근의 이 집으로 옮겨 온 지는 십 년이 되어 가지만, '청장서옥(靑莊書屋)'이라 불리던 옛집 서재 이름은 그대로이다. 백탑 아래 동네에 살 때, 초라한 나의 집을 안쓰럽게 여긴 벗들이 저마다 가진 책을 팔아 지어 준 공부방이다. 아마 방금 전 꿈속에서도 그곳에서 벗들과 어울렸을 것이다. 이 방의 문고리를 잡을 때마다 나는 늘 가슴이 두근거린다. 방에 들어서는 순간 등을 보이며 가지런히 꽂혀 있는 책들이 모두 한꺼번에 나를 향해 눈길을 돌리는 것만 같다. 눈과 눈이 마주치는, 책 속에 담긴 누군가의 마음과 내 마음이 마주치는 설렘.
첫째, 굶주린 때에 책을 읽으면, 소리가 훨씬 낭랑해져서 글귀가 잘 다가오고 배고픔도 느끼지 못한다. 둘째, 날씨가 추울 때 책을 읽으면, 그 소리의 기운이 스며들어 떨리는 몸이 진정되고 추위를 잊을 수 있다. 셋째, 근심 걱정으로 마음이 괴로울 때 책을 읽으면, 눈과 마음이 책에 집중하면서 천만 가지 근심이 모두 사라진다. 넷째, 기침병을 앓을 때 책을 읽으면, 그 소리가 목구멍의 걸림돌을 시원하게 뚫어 괴로운 기침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 어쩌면 책을 읽으며 얻는 이 네 가지 이로움은, 나만이 느끼는, 나에게만 쓸모 있는 이로움인지 모른다. 누가 그때의 나처럼 그렇게 굶주릴 때, 추울 때, 괴로울 때, 아플 때, 책을 읽으며 견디려 하겠는가.
나는 늘, 삶이 주는 무게에 짓눌려 가슴까지 차오른 말도 입 안에서 한 번 더 굴려야 하는 자신이 답답하였다.
촛불의 키가 얼마쯤 낮아졌을 때에야 비로소 자리가 편해져, 담헌 선생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계속 나를 보고 계셨는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선생은 빙그레 웃으셨다. 나로서는 처음 대하는 스승의 따뜻한 미소였다. 왠지 가슴이 뭉클했다. 선생은 단번에, 홀로 글을 읽으며 지낼 수밖에 없었던 나의 외로움을 알아보신 것 같았다.
상대방의 아픔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으려면 자신도 그처럼 아파본 적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시간이지만, 그 시간의 흔적은 사람의 기억과 마음 속에 남을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의 삶 속에 깊숙이 들어가면서, 시간이 흘러가는 길을 내기도 하고, 각자의 시간을 서로에게 나누어 주기도 한다. ... 시간을 나눈다는 것은, 반드시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는 사람들끼리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어릴 때, 워낙 말이 없고 내성적이었던 나는 밖에서 놀기보다는 혼자 책읽는 걸 좋아했었다.
언제부터 좋아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집에 좀 낡은 세계아동전집 머 그런 책이 있어서 그 전집을 다 읽고나서부터는
아빠가 가끔 교보문고엘 데리고 가주셨던거 같다.
그 큰 서점에서 실컷 책을 고르는게 즐거웠던거 같고, 그렇게 아빠랑 버스를 타고 시내를 나가는 것도 좋았던거 같다.
중고등학교 때부터는 혼자서 시내 서점엘 갔었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모의고사 같은 시험이 끝나고 나면,
종로까지 한번에 가는 버스를 타고, 시내엘 나가서 책을 구경하다가 한두권 골라들고 사오는 그 시간
그 순간이 어릴 적 내가 기억하는 행복했던 순간들이었다.
고등학교때 좋아했던 문학선생님 따라서 문예반엘 들어갔었고,
몇 안되는 친구와 책 이야기하는 걸 좋아했었고...
친구들한테 생일선물을 줄때도 대부분 내가 읽어봤던 책을 선물했었다.
대학엘 가고, 사회생활을 시작하고부터는
어딘가 답답하고 그러면 서점에 가서 한참을 책 구경하고, 가끔은 읽다가 오기도 하고,
그렇게 서너시간 서점에서 책에 파묻혀 있다가 나오면 다시 기분이 좋아졌었고,
가끔 여행을 갈때도, 책 한두권은 꼭 집어넣었고,
그렇게 가져간 책을 생각보다 빨리 읽게 되면,
여행지를 돌아다니면서 그 동네에 있는 작은 서점엘 들어가서
아무렇게나 쌓여있는 책을 둘러보면서, 읽고 싶었던 책을 골라내기도 하고,
대형 서점에서는 눈에 띄지 않던 책을, 작은 서점에서 찾아내서 다시 돌아오는 길에 읽으며 돌아왔었고,
가끔은 머릿 속이 복잡할 때는, 책 속 글자들을 읽으면서 잡 생각을 떨쳐버리기도 했었다.
그렇게 심심할 때, 말하기 싫을 때, 생각하기 싫을 때, 외로울 때,
그렇게 나에게도 책이 친구가 되어주었던 것 같다.
김탁환 선생의 백탑파시리즈 소설책들을 읽거나, 정민 선생의 <미쳐야 미친다>를 읽으면서
박지원을 중심으로 이덕무, 박제가, 등등의 이름을 보며, 스스로 '간서치'라고 불렀던 이덕무가 참 궁금했었다.
지금처럼 책이 흔하지 않았던 시절,
한 권의 책을 여러번 읽기도 하고, 친구들에게 책을 권하기도 하고 빌려읽기도 하고, 귀한 책은 옮겨적어가며 읽으면서
그렇게 배고플 때, 추울 때, 마음이 괴로울 때, 기침병이 날 때,
책을 읽으며 마음의 괴로움을 이기고, 책과 함께 행복했던 이덕무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아빠랑 같이 갔던 시내 대형서점도 생각나고, 문학선생님도 생각나고, 여행가는 기차 안에서 읽었던 책들...
그렇게 나에게도 책과 함께 행복했던 순간들이 무수하게 떠올랐다.
'나는 사실로 문살을 반듯하게 짠 다음 상상으로 만든 은은한 창호지를 그 위에 덧붙여 문을 내 보았습니다. 이 문을 통해 햇살도 드나들고, 바람도 드나들고, 옛사람과 우리의 마음도 서로 드나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머리말 중...
책을 쓴 사람과, 책 속의 사람들과, 책을 읽는 내가 함께 시간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는 것,
그렇게 앞으로도 책과 함께 행복할 수 있을 듯.
근데, <미쳐야 미친다>도 그랬고, <청춘의 문장들>도 그랬는데,
옛 사람들의 글들을 이렇게 읽다보면, 그들이 쓴 책을 직접 읽어보고 싶은 그런 마음이 든다.
그들이 쓴 한시와 글들을 직접 읽어보고 싶은 그런...
나중에 덕심언니 나이쯤이 되면 그때쯤엔 가능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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