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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듣고/책장.넘기는.소리

회복 가능한 세포, 인간, 세상 ... 회복하는 인간 : 오에 겐자부로 만년의 사색 / 오에 겐자부로











회복하는 인간 : 오에 겐자부로 만년의 사색 / 오에 겐자부로 지음 / 서은혜 옮김 / 고즈윈



인간은 실수하기 쉽다고 자각하여 그 기세를 늦추고자 노력하는 것이 관용.

articulacy 명백히 표현하기

자신이 좋아하는 말을 외우기 위해 만든 노트

특히 조연을 했던 연주자의 몇 번째인가의 연주에서, 바로 이 음악이 '지금' 만들어지고 있다고 하는, 더 바랄 것 없는 수용의 상태로 이끌려 가곤 했습니다. 이번 연속 연주회의 특징은, 각각의 곡을 초연했고 그 후에도 콘서트라든가 녹음을 통해 연주를 거듭해 온 이들이, 그, 혹은 그녀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을 통하여 '연마된', 요컨대 일래버레이션(elaboration)의 성과를 드러냈다는 것입니다. ... 이미 쓴 말들을 다시 고쳐 써 나가는 것, 역시 일래버레이션입니다. 일래버레이션을 자신의 경험으로서 받아들여주는 연주가가 미래의 독자입니다.

가슴에 새겨진 것은 루쉰이 처음 썼던 단편의 마지막 한 줄입니다. 화자는, 인간 모두가 인간을 잡아먹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들을 구하고 싶다고 절규합니다. 하다못해 아이들만이라도......

그렇구나, 그동안 나는 온갖 종류의, 하지만 한결같이 '친밀한 편지'를 받고 있었던 거야, 라고 저는 생각했던 것입니다. 낯선 이가 쓴 문장이건만 자신을 향해 있다고 깊이 느꼈던 건 그런 이유였어, 라고. 그리고 책이 그런 무엇이 되는 것은 상상력이 음직이기 때문이다. 나도 상상력을 의지하여 낯선 이들이게 '친밀한 편지'를 쓰자. 그것이 지금도 계속되는 제 생각입니다.

'목숨을 걸어도 좋다고 생각되는 친구'라는 '아름다운 낱말'은 쓰기에 따라서는 '끔찍한' 강제를 불러올 수도 있으니까요. '친구' 대신 '가족', '나라', '세계'라고 바꾸어 놓아 보십시오. ... 자신이 살 길을 생각하지 않는 공생은, 그야말로 모순입니다.

'entre chiens et loups'라는 말은 숲의 어슴푸레함 속에 보이는 것이 개인지 늑대인지 알 수 없다는 것에서 온 말이겠죠. 하지만 소설은, 개가 늑대로 돌아갈 때, 인간 역시 문화의 축적 따위는 허망하게 역행하여 늑대와 마찬가지가 된다, 그것이 전쟁의 시대가 보여 주는 진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우리들의 세계는 다시 한 번 개와 늑대 사이의 역행의 시간 속에 있습니다.

'우리들 모두에게는 숲 꼭대기에 '자기 나무'가 있다. 우리들의 넋은 거기서 내려왔고 거기로 올라간다. 그 나무 아래 서 있으면, 나이 먹은 자신을 만날 수도 있다.' ... 어린아이와 자신 사이에 커뮤니케이션의 파이프가 없다고 느끼는 것은 감정의 기복이 심한 저를 자주 구렁텅이에 빠뜨리곤 했습니다. 아내가, 언제나 열심히 일하는 점은 어머니와 닮아 있으면서도 '한숨'을 쉬지 않는 사람이라는 점은 고마운 일입니다.

새로운 헌법에 의하여 개인이 해방된 지금, 그 자유를 어떻게 질 높은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인가? 마루야마 씨는 '구속의 결여'로서의 자유를 그저 즐기는 것이 아닌, '이성적인 자기결정능력'을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인간다운 자유다, 라고 썼습니다. 그것이 새로운 규범을 창조하고 그것에 의하여 민주주의는 달성된다고...

노년의 제가 생각하는 것. 내가 떠날 때, 누이동생은 벌어진 일을 언어로 히카리에게 납득시키고, 히카리는 지적인 명랑함이 담긴 음악을 만든다.

'이번엔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갈 생각입니다. 올바른 대응을 할 것입니다. 물론 감정적인 강경책은 쓰지 않겠습니다. 전략을 가지고 신중하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대응해 나가겠습니다. 도중에 유야무야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장래를 내다보며 지속적으로 대응해 가겠습니다.' 독일의 전후 일관된 반성과 보상을 평가해 온 한국의 정치가들 가운데, 나는 노 대통령이 한발 더 나아가, 프랑스의 독일에 대한 태도(그것은 와타나베 가즈오가 전중.전후 계속해서 소개했던 그 나라의 문화적 특질로서의 '관용의 정신'을 바로 떠올릴 수 있습니다만)를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뜻깊게 느낍니다. '우리들 한국 국민도 프랑스처럼 너그러운 이웃으로서 일본과 함께 나아가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한다면 구원은 온다 하지만 결코 네가 몰랐던 방식으로' ... 시간이 흘러 그리운 땅을 다시 찾은 노시인은, 화산의 분화가 삼림을 파괴한 구획(히로시마와 마찬가지로 blast zone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에서 이루어진 복잡한 형태의 재생을 목격하고 앞의 두 줄을 떠올린 것입니다.

개인의 죽음을 강제하는 국가라고 하는 존재에 대한 공포

<프랑스 르네상스 단장(斷章> ... 와타나베 씨가 그 한 구절을 번역하면서, 인간은 '이성'과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생물과 다르지만 나아가 '손'을 갖고 있음으로써, '이성'과 '언어'에만 의지할 때 빠지게 되는 관념주의를 수정할 수 있다고 읽어 내시는 부분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 머리만으로 썼던 최초의 문장에서부터 점차 '손'을 통한 어떤 확실함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느꼈습니다. ... 오랫동안 소설 작업을 해 온 지금, 썼던 문장을 고쳐 쓴다고 하는 '손'의 작업에, 막다른 곳에 이르렀을 때일수록 도움을 받아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 핵시대를 만들어 낸 '이성'과 '언어', 그것들에 반성을 촉구하는 또 다른 강한 힘을 지닌 '손'의 역할.

제가 반갑게 알게 된 것은 독일 각 도시에 '문학의 집'이 있고 그곳에서의 낭독이 작가에게나 독자에게나 오랜 습관이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의 경우, 소설을 낭독한다곤 하지만 막 출판된 독일어 번역이니(<체인지링>이 'Tagame Berlin-Tokyo'가 되어 있습니다) 우선 연구자나 문예기자가 해설을 하고, 저도 거기 참가하고 나서 원문을 짤막하게 읽고, 지역극단의 배우가 독일어 낭독을 멋들어지게 해 줍니다. 그 후, 다시 저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 베를린 자유대학 강의 시절 동료의 통역으로 오가고, 책에 대한 사인이 이어집니다. 느지막이 일이 끝나면 조그만 레스토랑에서 '문학의 집' 사람에게 그 지역의 문학 사정을 들으며 한밤중의 식사를 합니다. ... 소리 내어 읽는다는 행위

'알다'에서 '이해하다'로 나아감으로써 지식은 스스로 부려 쓸 수 있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야나기다는 '익히다' 다음에 '깨닫다'를 둡니다만, 저는 '이해하다' 앞에도 '깨닫다'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알게 된 것을 스스로 쓸 수 있도록 함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발상에 이르는 일입니다.

애독하고 있는 해외의 작가, 비평가와 만나게 될 때마다 제가 하는 일은, 번역으로 가까워진 작품이라도 핵심을 이룬다고 여겨지는 부분에 관해서는 원서를 보고, 필요하다면 자기 나름대로 고쳐 본 번역어(혹은 번역문)을 원어와 함께 기억해 두는 것입니다. ... 그리하여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세부의 언어 하나하나에 따라 사물의 혼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쓰는 이로서는 그것이 실현되도록 문장을 연마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나이 든 자신을 격려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밝은 전망이라곤 전혀 없는 나날에 시간을 두고 일어나는 새로운 일들에 힘을 얻어 가며 우리는 갓난아이와의 공생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저는 히카리가 작곡한 첫 테이프를 들으며 이것은 먼 옛날, 어떤 날들에 시작된, '어떤 힘을 지닌 무엇인가의 자연스런 진행의 연속이다'라고 느꼈던 듯합니다. ... 지금까지 이런 일은 없었다는 식의 극적인 것이 아니라,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지금까지보다 확실해진 언어로 저와 아내의 대화에 끼어들어오는-아주 드물긴 하지만-일도 있게 된 것입니다. ... 이제부터 히카리가 더욱 고통스런 경험을 할 때가 오더라도, 그것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우선 가족 가운데 가장 나이 많은 제가 사라지는 것이겠지만, 그 밝은 힘이 충격으로부터 그를 회복시켜 주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문체, 스타일이란 단어, 어절의 레벨에서 시작되어 작품 전체, 거기서 떠오르는 글쓴이의 인간상에까지 걸쳐 입체적으로 구축되는 법입니다.

똑바로 선다, 자립한다는 것을 기본에 두는 것,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 어린이라는 존재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먼저 똑바로 서고자 하는 존재라는 것. ... 그리하여 그것은 저 자신에 대해서도, 히카리에게 비추어보는 방식으로 스스로가 똑바로 서 있는지 어떤지를 가끔 자성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 '인간은 회복하는 존재다' ... 그것은 경애해 온 친구의 죽음 후에(3년 전, 그는 백혈병과의 긴 싸움 끝에 죽었으니 일반적 의미에서 '회복'은 아니었지만 그 죽음이 또한 명백히 '회복'이 가져오는 것에 버금가는 힘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납득한 것입니다. ... 아기는 저런 무게를 짊어지고도, 그 스스로 생명의 위를 향한 비탈길을 올라가고 있다. 만약 이 의지가 갓난아이에게 없다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곤경, 그 연속은 피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회복'이 있다고 하는 바로 그 사실이 히카리와의 공생을 통하여 저와 아내가 확인해 온 신념인 것입니다. ... 텔레비전 전성시대에 커뮤니케이션은 텔레비전 출연자의 일방적 내러티브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상례화되고 있으며 이는 참된 커뮤니케이션의 결손을 불러오고 있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너머에 대한 장기적 전망으로서는 의지적 낙관주의를 유지하고 싶다고도 말하고 싶습니다.




마찬가지로 경향신문 '책읽는 경향'에 소개되었던 책.

요즘 얇은 양장본으로 많이 나오는 일본 현대소설류 보다,
나쓰메 소세키, 아쿠다가와 류노스케, 다자이 오사무 같은... 일본의 근대작가의 책들을 더 좋아하는데...
(물론 그것도, '매일매일 쏟아져나오는 일본현대소설들이 너무 가볍다'는 나의 편견 때문이기는 하나...)

쉽게 읽히지는 않지만, 단어 하나하나 어쩌면 쉼표 하나도 허투루 쓰지 않았을 것 같은 오에 선생님의...
올해 일흔다섯의 만년의 노작가의 에세이,
그것도 장애를 가진 아들과의 생활을 통해서 선생님이 깨달은 삶에 대한 인간에 대한 어떤 인식을 엿보고 싶다는 생각에 읽게 되었다.

<생물과 무생물 사이>를 8월말에 읽고 어제 리뷰를 올린 후, 이 책을 마저 읽으면서...
두 책이 나에게 '친밀한 편지'를 보내듯, 묘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신체의 아주 작은 일부를 이루는 세포도 DNA의 어떤 부분에 결핍이 생기면,
다양한 방법으로 그 결핍을 보충하여 원래의 상태로 돌아온다는 '동적 평형이 갖는 유연한 적응력과 자연스러운 복원력'을
이번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본인의 장애를 스스로 극복해가는 '회복'의 과정으로 보여주고 있는
그래서 그 한 사람의 인간처럼 이 세상도 회복할 수 있다는 '장기적 전망으로서의 의지적 낙관주의'를 기대하게 하는...

답답하고, 절망스럽다고 할만한 상황에서도 절대적인 절망은 아닐꺼라고,
느릿해 보여서,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여서, 극적이지도 않고, 그래서 답답하더라도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우리는 '회복'하고있는 중이라고,
그러니 쉽게 절망하거나, 너무 빨리 포기하지 말자고,
일흔다섯 노작가의 메시지가 몸 깊숙한 곳에서 깊게 울린다.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무엇때문에라도 부럽다든가, 좋다든가 하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는데
'오에 겐자부로'라는 작가가 일흔다섯의 삶을 그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도 당분간은 그럴 것이라는 것이 갑자기 부러워졌다.
우리에게도 이런 어른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