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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살아간 한 인물에 대해서 ... 나,황진이 (주석판) / 김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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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황진이 (주석판) / 김탁환 / 푸른역사


진(眞). 참된 자. 그것이 어머니의 바람이었답니다. ...... 진이라 불리는 사람이 거짓으로 세상을 살아가기란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거짓을 부리고픈 적도 많았지만 그때마다 번번히 포기해야 했답니다. 어머니가 내게 남긴 그 어떤 유산보다도 '진'이라는 글자 하나의 위력이 컸던 것이지요. 참도 불쾌하고 거짓도 불쾌하니 그 둘 전부를 마음에 담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참된 곳 하나만을 향해 성난 사자처럼 달려들었지요. 과연 그 방법밖에 없었을까요. 동글고 부드럽게 감싸 안거나 두 눈 꼭 감고 지나쳐야 하는 자리에서도 지나체게 밝고 곧은 길만을 고집하며 귀중한 삶의 가르침들을 놓친 것은 아닐까요.

돌이길 수 없는 일들, 돌아갈 수 없는 곳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이 인생일까요.

억울한 만큼 슬픈 만큼 더 빨리 달려나가려고 했지요. 지(智)를 명(明)인 줄 알고 유력(有力)을 강(强)이라고 착각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 <도덕경>에서는 지와 명, 유력과 강을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 있다.
     "남을 아는 것을 지라 하고 자신을 아는 것을 명이라 한다. 남을 이기는 것을 유력이라 하고 자신을 이기는 것을 강이라 한다."

새끼할머니는 회초리를 치고 또 치며 기생은 결코 검은 동자 아리로 흰 빛이 보여서는 아니 된다고 강조했답니다. 팔목에 돌을 올린 채 술을 따르라고도 했고, 머리 위에 베개를 이고 다소곳이 걷는 법을 가르치기도 했지요. 그 중에서도 가장 자주 오랫동안 가르친 것이 바로 속마음을 감추는 일이었어요. ...... 항상 입가에 웃음을 머금어야 하며 슬프거나 화나거나 괴롭거나 아픈 표정은 결코 지으면 아니 되었습니다. ...... 쓰개치마로 발찌(목 뒤에 생기는 부스럼)를 가리듯 마음을 감추고 숨기는 것이 나 자신을 위한 일임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지요. 재주를 드러낼수록 더 심하게 다칠 수 있음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지요.

양반은 양반답고 아전은 아전다우며 기생은 기생다워야 한다는 규범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겁니다. 그 다움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요. 나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내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면, 어찌 그것을 내 삶의 원칙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한 번 준 것을 쉽게 잊을 수 있겠니. 다른 것도 아닌 마음인데.

시 한 편에 삶 전체가 녹아드는 것처럼, 노래 한 소절에 지난 세월의 고통이 담겨 있었지요. 배고픔을 배고픔이라 하고 기쁨을 기쁨이라 하는 것은 쉽습니다. 심장에 큰 구멍이 뚫려 눈물이 흘러내리는데도 청아한 소리를 낼 수 있을 때 진정 음률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겠지요.

어떻게 사는가보다 어떻게 죽는가가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이치를 깨쳤더라면, 나는 한양으로 돌아가진 않더라도 어머니 곁에서 마지막 시간을 조용히 함께 보냈을지도 모릅니다. 그때 나는 죽음과 얼굴을 맞대기 시작한 사람을 위로하기에는 너무 피가 뜨거웠어요.

그 봄에 벌써 머물지 않을 봄과 떨어지는 꽃을 염려했던 탓일까요. 당신은 나예요, 자신 있게 속삭이던 나날도 끝이 났답니다.
  - 백거이의 시 <떨어지는 꽃(落花古調賦)>를 염두에 둔 듯하다.
    봄을 붙들어도 봄은 머물지 않고       留春春不住
    봄이 돌아가면 사람만 쓸쓸하고        春歸人寂寞
    바람을 싫어해도 바람은 안 그치고    厭風風不定
    바람이 일어나면 꽃만 지고 마나니    風起花蕭索

죽음이 사라짐은 아니겠지요. 한 조각 촛불의 기가 눈 앞에서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 기는 끝내 없어지지 않는 법이니까요. 기의 모임과 흩어짐에 따라 죽음과 삶, 사람과 귀신이 나뉠 뿐, 기 자체는 사라질 수 없답니다.

그리는 꿈 (相思夢)  황진이 作
  그리는 이 심정은 꿈에서나 만날 뿐           相思相見兄憑夢
  내가 그대 찾아갈 때 님이 나를 찾아왔네    儂訪歡時歡訪
  바라거니 언제일까 다음날 밤 꿈에는         願使遙遙他夜夢
  오가는 그 길에서 우리 함께 만나기를        一時同作路中逢


드라마 '황진이'를 보면서... 그 시대를 살던 '황진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관심이 생겼고,
드라마의 인기로 우후죽순 발간된 황진이 라는 이름의 소설들 중 드라마의 원작이기도 한...
김탁환의 <나,황진이>를 읽고 싶어졌다.

김탁환의 <나,황진이>는 2002년 일반 소설판과 주석판으로 발간되었고,
이번에 일반 소설판은 그림을 삽입하여 다시 발행되었다. 내가 읽은 것은 주석판.

김탁환의 <나,황진이>는 스승(서경덕)이 돌아가시고 난 후, 스승에 대한 기록을 모아보자는
허태휘(허균, 허난설헌의 아버지, 황진이와 함께 서경덕을 스승으로 모심)의 의견에 따라
그에게 보내는 편지글 형식으로 씌여진 소설이다.

실존인물에 대한 소설
역사의 기록이란 것이 승자에 의한 기록이기 때문에
남겨진 기록만으로 어떤 인물을 이해할 때는 기록 이면에 있는 행간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조선시대 '기생'신분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기록이라는 것이
불분명한 출생부터, 직업으로 인한 오해부터, 딱 가쉽기사 거리의 스캔들까지가 끝이고
대부분의 황진이 관련 소설이 이 기록을 바탕으로 한 황진이의 스캔들에 관한 이야기에 치중되어 있는 반면

김탁환의 <나,황진이>는 황진이에 대한 기록 이외에
조선시대 '기생'에 대한 기록, 개성 및 서울 등 황진이의 발길이 닿았던 지역에 대한 기록을 바탕으로
조선 초중기의 한시, 당시를 인용한 표현을 통해
'황진이'를 현재를 생생하게 살아가는 사람으로 살려놓았다.
남녀간의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여인의 삶에 대해, 기생이라는 신분에 대해, 그 신분에 의한 차별에 대해,
시와 노래에 대해, 죽음에 대해, 인생의 덧없음에 대해,
현재의 우리가 생각하고 고민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부딪혀온 한 인물로...

참고로...
드라마에서의 황진이는 이 책을 원작으로 하고 있지만,
상사병으로 죽었다는 동네 총각을 황진이와 첫정을 주고받은 '김은호'로,
원작에는 없던... 황진이에게 여인의 삶과 행복을 느끼게 하는 '김정한'이라는 인물로,
새끼할머니로 표현된 행수를 '백무'라는 스승으로 잘 살려놓았다.
김정한이라는 인물을 통해, 윤선주 작가는 황진이를 위로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또한 옛기록에 남아있던 재미있고 예쁜 우리 옛말도 주석을 달아 그대로 살려놓았다.


구름비단병풍 (새벽 안개)
인어구슬 (눈물)
꽃잠 (첫날밤의 잠)
쌍리 (雙鯉, 편지)
밤잔물 (밤을 지낸 자리끼)
유하 (流霞, 신선이 마신다는 술)
은빛 대나무 (銀竹, 큰 비)
비꽃 (비가 오기 시작할 때 몇 낱씩 떨어지는 빗방울)
고빗사위 (중요한 대목 가운데서도 가장 아슬아슬한 순간)
눈갈기 (말의 갈기처럼 흩날리는 눈보라)
동리 (東籬, 세상을 피해 사는 고상한 선비의 거처)
소경낚시 (낚싯바늘이 없는 낚시)
대그늘 (竹陰, 대숲의 그늘진 곳)
삼팽 (三彭, 인간의 몸에 살면서 옥황상제에게 그 사람의 잘못을 일러바치는 벌레)
바람꽃 (큰 바람이 일기 전 먼 산에 구름같이 끼는 뽀얀 기운)


이 책을 읽고... 또, 드라마를 보고...
책의 작가인 김탁환 선생님과 드라마 작가인 윤선주 작가님을 개인적으로 뵙고 술한잔 대접하고 싶어졌고,
김탁환 선생님에게 '이중섭'에 관한 소설도 써달라고 부탁하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