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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진 편견들에 대해서 ... 유대인 이미지의 역사 / 볼프강 벤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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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이미지의 역사 Bilder Vom Juden / 볼프강 벤츠 / 윤용선 역 / 푸른역사



프라하의 유대인 공동묘지. 1478년에 조성되었으며, 세월이 흐르면서 약간 확장되기는 했으나 기본적으로는 중세 때의 규모와 비슷하다. 공간이 부족하여 무려 12층까지 포개어 매장하기도 했다. 비좁은 공간에 빽빽이 들어찬 비석의 수는 1만2천여 기이며, 실제 매장된 사람 수는 10만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위조에 관한 정확한 발견이나 잘못된 발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에코의 다음과 같은 질문이다. "우리는 그 현상이 역사적으로 끼친 영향을 목격한 뒤에 소설이 이처럼 삶에 침투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물론 이에 대한 대답은 없다. 다만 악의적인 이야기가 광신자의 머리 밖으로 나와 현실이 되어 나타나며, 삼류 소설의 하찮은 내용이 정치 독트린이 되고, 급기야 혼란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혼란 때문에 영향력 있는 세계 해석의 전범이 됨에도 불구하고, 이와 관련해서는 기껏해야 계몽주의적인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경고 정도만이 있을 뿐이다.

만약 개종이 - 그리고 이를 통한 유대 정체성의 포기가 -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전제조건이었다면, 유대인 해방은 완전하게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다. 게다가 유대인에게는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는 통로가 여전히 막혀 있었다.

통합보다는 배제가 일반적이었다는 사실이 두 가지 측면에서 분명하게 드라난다. 먼저 평등한 호혜주의는 존재하지 않았다. 일부 유대인은 동화가 진행되는 중에도 항상 게토 안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 개종한 유대인들 역시 게토에 머물러 있기는 마찬가지였다(이들에게는 유대교와의 형식적인 단절이 요구되었는데, 이는 사회적 지위 상승의 전제조건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독일인들은 유대인과 사업적으로나 공적으로는 관계를 맺었지만 사적인 관계는 거의 갖지 않았다. 설사 사적인 관계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는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공생'을 포함한 통합론은 유대인들이 더 이상 유대적인 것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을 - 따라서 기독교의 세례, 독일 문화의 인정, 애국에 대한 고백 등이 요구되었다 - 전제로 하며,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유대인 명사들은 비유대인의 눈에 단지 손님의 지위를 가진 이방인 독일인에 불과했다.

독일에서 유대인 해방은 수많은 짧은 시간에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다. 독일에서 유대인 해방은 수많은 반동과 후퇴를 감안하더라도 족히 120년이 걸렸다. 그러나 유대인 배제와 물리적인 절멸은 불과 10년 만에 이루어졌다.

<안네의 일기>에는 홀로코스트의 참상이 드러나지 않으며, 일기는 안네로부터 시작해 안네에서 끝난다. 따라서 독자들은 정작 중요한 것을 알아낼 수 없으며, 박해의 고통은 암스테르담 프린젠 운하변의 어느 건물 뒷집에 은신해 있던 유대인 여덟 명의 작은 세계 속으로 축소된다. 일기에서 유대인 학살은 - 플라톤의 동굴우화에 등장하는 현실처럼 - 단지 위협의 그림자일 뿐이며 공포와 희망 속에서만 표현된다.

비극을 희망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라는 미국식 관점이 유럽에 영향을 끼쳤다.

수백만 명이 살해되고 있는 상황을 모르는, 숨어 있는 어린 유대인의 사적인 삶의 세계로 박해의 현실이 전이됨으로써, 독자들은 게토와 절멸수용소와 노동수용소의 경험담을 읽으면서 흔히 갖게 되는 존재론적인 공포를 느끼지 않고 책을 읽을 수 있다. 공포는 감정의 고양을 막으며, 많은 독자들은 끔찍한 사건을 전달받는 것 자체만으로도 상처받을 수 있다는 염려 때문에 사실적인 글을 피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수용소 방문을 기피하는 이유도 이와 유사하다.

'유대인'은 그들과 전혀 상관없는 (아니면 고작해야 간접적인 상관만 있는) 불쾌함의 상징이다. 불쾌함이란 오늘날 기억되고 있는 독일 역사가 주는 부담이며, 그 부담으로부터 수치심과 불안이 비롯되고 격앙된 자항과 책임 전가가 일어난다. '보상'을 위해 얼마나 더 지불해야 하는가, '화해'란 영원히 불가능한 것은 아닌가, 유대인은 왜 잊으려 하지 않는가, 독일인은 영원히 죄책감을 느껴야만 하는가 등과 같은 질문으로 위장된 공격이 자행되고 있다.

훼손된 유대인 공동묘지와 추모비, 유대 회당에 그려진 하켄크로이츠, 유대인 저명인사에게 날아드는 익명의 편지, 적의로 가득 찬 극우 언론의 보도 등은 배제와 거부의 시위이며, 이러한 행위는 소수에 의해 자행되지만 자신을 겉으로 드러내 보이지 않는 다수의 갈채를 받는다.

생존 유대인들은 독일인들로부터 질시와 배척을 당했다 - 독일인들은 이들로 인해 억압된 죄의식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독일에서 유대인으로 산다는 심리적 어려움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많은 유대인들은 독일에 살 수 없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독일에서의 삶을 정당화해야 하는 중압감에 시달리거나 학살된 가족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다.

이러한 사건들은 편견의 힘이 얼마나 강한가를 보여주며, 폴란드인과 유대인이 함께 당한 나치 박해의 고통조차도 인간의 본성을 바꾸거나 증오심을 제거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결핍에 대한 두려움과 경험은 (흔히 지위 상실의 위험과 결부되어)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인식하는 데 주요하게 작용하며 소수자에 대한 행동에 영향을 끼친다. 이때 소수자의 가치는 자신보다 낮은 것으로 평가된다. 박탈 이론은 경험에서 비롯된 (예를 들어 더 잘사는 이주자) 선입관의 형성과 영향을 설명한다. 이러한 선입관은 소수자의 사회적 지위 상승이 자기집단의 지위 하락을 대가로 이루어진다고 봄으로써 결국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생성한다.



아우슈비츠 다녀오면서 들었던 가장 큰 의문은, 그들은 유대인을 왜 그렇게 미워하게 됐는가이다.
또, 아우슈비츠가 독일이 아닌 폴란드에 있다는 것.
독일에 있는 유대인 뿐만 아니라, 전유럽에 있던 모든 나라에서 유대인 학살에 동조했다는 것.

유대인 이미지의 역사를 읽으면서, 우리에게는 나에게는 이런 편견이 없는가 생각해보았다.
우리가 일본에 대해 갖는 편견, 장애인에게 갖는 편견, 나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해 갖는 편견
이 모든 것들이 그들의 유대인에 대한 편견과 다르지 않다는 것.
역사는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할 뿐이고, 역사는 되풀이될 수도 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