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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듯한 글쓰기, 그리고 따듯한 글읽기 ... 천년습작 : 김탁환의 따듯한 글쓰기 특강 / 김탁환












천년습작 : 김탁환의 따듯한 글쓰기 특강 / 김탁환 / 살림



카프카는 한 여자와 약혼과 파혼을 반복합니다. 그리고 평생을 노동자로서 살아가며 자신이 글쟁이인가, 아닌가에 대해 끝없이 번뇌하였죠. 이제는 대단한 문장이라고 평가받는 그의 작품 활동을 이끌었던 것은 사실 이 끔찍한 불안입니다.

공부란 만남입니다. ... '만남'이란 단어 자체에 자의식을 갖게 된 것도 그 무렵부터였나 봅니다. 이미 주어진 길(형식)은 일단 모두 의심했지요.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만날 때면, 어떻게 만나는 것이 상대를 아는 데 가장 나은지를 고민했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안다고 할 때는, 안다 앞에 '무엇을'에 해당하는 목적어가 생략되어 있지요. ... 시인을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시인 아무개의 '무엇을' 아는 것일까요. 일차적으로 시인을 안다는 것은 '시인'이라는 규정 속에 존재하는. 시를 쓰는 인간을 안다는 뜻일 겁니다. 시를 쓰는 인간을, 우리는 어떤 만남을 통해 알 수 있을까요. ... 인터뷰는 이 유아론과의 싸움입니다. 사이(inter)에서 본다(view)는 것은 내 것만이 아닌 내 것이 아닌 것과의 관계를 따지기 때문입니다.

<달의 궁전>을 보면, 가난한 주인공이 끼니를 잇기 위해, 가구처럼 사용하던 책 상자들을 헌책방에 처분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물론 주인공은 그 책들을 다 읽었지요. 책들이 사라지는 것을 주인공은 자신이 스스로 택한 소멸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완전한 소멸은 아닙니다.

작품을 쓸 때는 고상한 말로 카타르시스, 야한 말로 오르가슴이 몰려옵니다. 몸과 영혼을 최고 상태로 고양시킨 후 그 상태를 오랫동안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 그러다가 작품이 끝나면 엄청난 공허감이 밀려듭니다. 이 공허감을 없애기 위해 헤밍웨이의 경우에는 여자를 바꾸었고, 도스토예프스키는 도박을 했습니다. 저는 주로 여행을 다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소설가는 머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손입니다. 발자크처럼 손으로 쉴 새 없이 집필하는 것, 과잉으로 소설 세계에 빠지는 것만이 뛰어난 소설가가 되는 길입니다.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언어와 문장에 굉장한 자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문장 하나하나를 내가 왜 이렇게 쓸 수밖에 없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가장 발을 잘 듣는 것 같으면서도 말을 안 듣는 것이 손가락입니다. 습작 시절엔 눈은 알지만 손은 못 하는, '눈과 순의 괴리'로 인해 괴로울 때가 많았습니다. 눈으로 좋은 작품인지 평가할 수는 있지만 정작 손으로 그런 작품을 쓰지는 못하지요. 냉정하게 들리겠지만 결국 작품은 손으로 쓰는 겁니다.

흔히 노동자를 육체노동자와 정신노동자로 나누고, 예술가를 후자의 대표적인 예로 드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오해입니다. 예술가는 육체노동자이자 정신노동자입니다. 육체는 정신의 깨달음을 전달하는 도구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조각가의 손, 발레리나의 발은 그 자체로 하나의 존재입니다.

다양한 비판을 받을 각오를 하고 고백하자면, 저는 소설, 나아가 어떤 예술이든, 한 작가에게 진짜 무엇인가를 배우기 위해서는 그 작가의 내제자가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내제자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정의가 있겠으나, 제 생각에는 작업실로 불러들여 가르친 제자를 이르는 것이겠습니다. 스승의 작품이 탄생하는 내밀한 순간을 남김없이 곁에서 지켜본 제자 말입니다. 스승이 자리를 비운 사이, 스승의 책꽂이를 보며 책을 배열하는 방법을 배우고, 스승의 책상에 흐트러진 자료들을 들추며 장면 묘사를 완성시켜나가는 방식을 배우고, 스승이 구긴 파지를 주우며 스승이 만족하지 못한 문장을 배우는 식이지요.

'예술은 과연 가르칠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것일까?' 저는 가르칠 수 있고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 저는 자세를 가르치고 배운다고 생각합니다. 예술을 하는 자의 자세이지요. 이때 자세는 단순한 마음가짐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세는 정신과 육체가 집중되어 예술작품을 만들어내기에 가장 적합한 상태입니다.

관조할 수 있는 눈. 즉 내면의 깊이나 인간의 삶에 대한 강력한 요약을 할 수 있는 눈.

그 손에 관한 육체적인 모든 것을 알고, 그 손이 간직한 역사를 익히고, 그 역사가 육체에 새겨져 만들어진 면과 선과 점들을 정확히 묘사하고 조각하도록 익히는 겁니다. 모든 손을 익히고자 하는 것은 개별성에 대한 집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것이 아니라, 사물 자체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언어 위에서 놀아나면 개별성은 사라지고 보편성만 남습니다. 어떤 사물인지, 그 개별자로 표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비극적인 주인공처럼 고뇌를 드러내지는 않지만, 희극적인 주인공 역시 고독합니다. 다만 그들은 그 고독을 내면으로부터 후벼파지 않고 행동으로 간명하게 드러낼 따름이죠. 고독을 견디지 못하면 비극적인 삶과 희극적인 삶도 불가능합니다. 철저한 고독은 철저한 불일치와 놀라운 비약을 낳고 돌이킬 수 없는 삶과 죽음을 만듭니다. 그것들의 가치를 읽어내는 것이 작가의 임무겠지요.

그리하여 부끄러움은 그녀의 삶의 방식이 됩니다. 다시 말해 세상을 대할 때마다 그녀가 이 모든 부당함을 받아들이는 하나의 방식이 되는 것이죠.

작가에게는 수년이 지난 후 개작할 수 있는 책과 전혀 손을 댈 수 없는 책이 있습니다. 아니 에르노의 작품들은 후자입니다. 한번 쓰고 나면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작품들인 게지요. 작가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것은 '찰나의 영원성'을 기록하고 싶은 욕망입니다.

아니 에르노는 <단순한 열정>을 왜 쓸까요. 문득 아니 에르노가 <부끄러움>에 대해 논한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회상도 하나의 체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열정을 누리는 것은 한 권의 책을 써내는 일과 똑같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한순간 한순간 그를 기다리고 그와 사랑을 나누고 그와 헤어질 때 최선을 다하면서, 이런 찰나 찰나에 목숨 거는 자신의 모습이 책을 쓸 때와 같다고 느꼈던 것이지요. ... 이 열정의 순간들은 그녀에게 속하지도 않고 A에게 속하지도 않습니다. 열정은 그녀와 A 사이에서 만들어졌지만, 그 열정의 주인은 오로지 열정 자신이라는 것이지요. 두 사람이 나눈 사랑은 아주 특별하며 또 순간순간의 밀어와 움직임들은 세상에서 단 하나뿐이지만, 그들을 감싼 열정은 어쩌면 보편의 차원으로 올라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순간에 대한 정직한 시선이 보편을 잉태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이야기의 힘이겠지요.

내가 누구인지 가장 잘 아는 이도 나지만, 내가 누구란 걸 정확히 나타내기 어려운 이도 역시 나입니다. 거기 1인칭 리얼리스트의 고민이 서려 있습니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 때문에 어떤 식으로 회고하는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삶은 모순입니다. 15살, 20살, 40살의 나는 각각 다른 존재이지요. 그 삶을 자세히 보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인생을 격정적으로 돌파하는 사람은 1년 전의 자기 말을 부정합니다. 한 인간의 삶을 그릴 때는 모순되고 비약하는 포인트가 있습니다. 단절의 순간이지요. 그 순간을 짚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길이 사막이든 깎아지른 얼음절벽이든 무더운 숲이든 가리지 않습니다. 백 명이 떠나면 겨우 한둘 살아 돌아올까 말까한 서역 여행길에 어찌 위기가 없고 두려움이 없고 슬픔이 없고 아픔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신라승 혜초는 마을과 마을 사이를 단숨에 한 문장으로 압축하며 건너뜁니다. 오르한 파묵의 만연체나 박지원의 변화무쌍한 글쓰기에 맞서는 혜초의 무기는 침묵입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방위와 숫자입니다.

아이디어가 하나의 완전한 이야기로 구상될 때까지, 작가는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합니다. 이 아이디어를 가지고 어디까지 얼마나 뻗어갈 수 있는가를 충분히 짚고 가늠한 다음, 그 한계를 더 넓히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한 다음, 비로소 작가는 이야기의 첫 문장을行시작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글은 '읽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감(感)하고 동(動)하면서 글은 '느끼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느낌을 '품는' 글이 바로 '비평'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작자는 읽고 느끼고 품는 자라고 확신합니다. 한없이 따듯하게! ... 따듯함을 지니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열린 마음이겠지요. 편견 없이 내 앞에 놓인 문장을 하나하나 음미할 여유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지속적인 관심 역시 따듯한 품기의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약점을 찾아내는 읽기, 생채기를 드러내는 글쓰기가 아니라, 그 책이 지닌 가치를 큰 틀에서 감싸는 이해와 배려가 따라야 합니다.

'낯선 세계로의 여행 이야기(異界旅行譚)'는 바로 이 변신의 과정을 차근차근 펼쳐 보여주는 모험 이야기입니다. 여행 이전과 여행 이후의 주인공이 전혀 변화가 없다면, 이 여행은 가지 않느니만 못한 것이겠지요.

<원미동 사람들>에는 격이 다른 슬픔이 담겨 있습니다. 가난한 것, 배우지 못한 것, 치욕적인 상처를 받은 것. 이런 것들을 복원시키는 양 선생의 손길은 참 섬세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살아난 지지리도 못난 삶 자체는 우리에게 어떤 깨달음도 주지 못합니다. 독자들이 원미동 사람들의 슬픔을 자신의 슬픔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이 작은 인간들이 수많은 절망과 좌절을 겪으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그 무엇인가를 틀어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 돌이켜보면 80년대 소설들은 단숨이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픈 욕망이 강했습니다. 양귀자 선생은 단 한 번의 결정적인 혁신으로 삶이 바뀌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차라리 더디게 한없이 더디게 그 지난한 삶들을 따르지요. 무릎이 꺾이고 한숨이 절로 나오는 순간들을 하나씩 보듬이 안습니다. 문명이 발달하고 세대가 달라지더라도,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그런 난감한 순간이 찾아오는 법입니다. 그리고 그 절망을 헤쳐 나갈 사람은 바로 나 자신밖에 없지요. ...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가는 생활인들의 일상은 그들의 내면과 따로 놀지 않습니다. 내면과 외면, 이성과 감정, 생활과 꿈을 분리시키는 것 자체가 한 인간을 불구로 만드는 것이니까요.

복수의 과정이 잔혹하다고 비판받을 수도 있겠지요. 분명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감게 하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피를 뿌리고 살을 찢고 심장을 질겅질겅 씹어대더라도 그것이 결코 돈의 잔혹함에는 미치지 못하겠지요.

비록 이 접점이 자족적이고 선언의 의미가 있다고 해도, 내 '옆'의 존재를 내 '안'의 존재로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삶의 근본일 것입니다.

불행이란 '나, 지금, 여기'에 대한 뼈저린 각성에 다름 아닙니다. 그런 각성 없이 일상을 편안히 사는 인생과 그런 각성을 만나 일상을 부수고 다른 삶을 꿈꾸는 인생.

중요한 것은 어떤 책을 접하면서 어떤 사유의 극한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 사유가 옳은가 그른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헤르만 헤세 식으로 말하자면, 알이 껍질을 깨고 나와서 궁극적인 진리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죠.

저는 글쓰기와 이야기 만들기를 '인생을 값지게 만드는 인류사적 행위'로 파악합니다. 잔재주가 아니라 삶을 관통하는 일관된 '자세'를 확립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 글쓰기와 이야기 만들기의 핵심은 그럴 듯한 흉내가 아니라 '진심 그 자체'입니다.





글쓰기라는 작업은 '내가 동경하기는 하지만, 내가 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왔다.
고등학교 때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을 읽으면서 (왜 하필 이 책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생각했고,
누군가 어떤 책을 읽고 인생을 바꿀 결심을 하고, 그래서 그 전과 다른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할 수 있는 책은 아무나 쓸 수 없는 책이라고
베토벤 같은 사람은 하늘에서 들리는 소리를 악보에 그렸을 뿐이라고 그런 천재성은 타고나는 사람만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재작년쯤인가, <나, 황진이>를 읽으면서 알게 된 김탁환 선생님의 글을 종종 읽으며
각 인물들의 디테일한 심리 표현과 각 시대를 읽어내는 시선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해왔었는데,
지난달에 인터파크에서 진행한 '김탁환 작가와의 아주 특별한 티타임'이라는 이벤트에 당첨되어 참석하게 되었다.



글쓰기에 관심이 있어서도 아니고, 이 즈음에 나온 <노서아가비>란 책은 아직 읽지도 않았지만,
그동안 선생님 책들을 읽으면서 궁금했던 거도 여쭤보고 싶기도 했고, 기회가 된다면 한번 직접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찾아가서는
글쓰기에 관한 짧은 강의를 듣고, 평소 궁금했던 것도 여쭤보고,
선생님 책 중에 첫번째로 읽었던 <나, 황진이(주석판)>에 싸인도 받았다.


소설이든, 시든, 에세이든, 드라마 대본이든, 시나리오든, 어떤 형태의 글이든,
'글'이란 걸 쓰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잘나서가 아니라, 못나고, 불쌍하고, 쓸쓸하고, 외롭고, 밉고, 싫어도
모든 인간은 어느 누군가에게는 이해받을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은 '글'이란 걸 통해서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모두에게 지탄받는 악인이 등장하고, 그 악인이 끝내 벌을 받는 권선징악으로 끝나는 글 보다는,
등장인물들이 하나 같이 다 이해가 되고, 안타깝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한,
그래서 그 글 속에 등장하는 어떤 인물이 내 주변의 누군가와 닮아 있고, 그 누군가를 내가 좀 더 이해할 수 있다면,
그런 '글'이 좋은 글이라고 생각한다.

김탁환 선생님의 따듯한 글쓰기도 이런 느낌이 아닐까,
인간에 대한 따듯한 시선. 그 시선으로 인간을, 인생을, 역사를 관통하는 어떤 '진실'을 찾아내는 것.

이 책을 읽고 난 뒤에도 글쓰기라는 작업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으나,
글을 읽는 시선은 좀 더 따듯해질 수 있을 것 같다.
생채기를 드러내려고 하는 글읽기가 아닌, 그 책이 지닌 가치를 찾아내는 글읽기.
내가 알고 있는, 인식하고 있는 수준에서의 어의없는 판단이 아닌, 
카프카의 끔찍한 불안과 그 불안에서 탄생하게 된 글을 읽어낼 수 있는 따듯한 글읽기, 시도해볼 것.


폴 오스터의 <달의 궁전>, 아니 에르노의 <부끄러움>, <단순한 열정>, 양귀자의 <원미동 사람들>, 황지우의 <나는 너다> 읽어볼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