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보고듣고/책장.넘기는.소리

세상 속 수 많은 예수들을 위하여 ... 예수전 / 김규항










예수전 / 김규항 글 / 돌베개


1장

[마르코복음]에 등장하는, 예수 당시의 사람들에게 이 말은 정치적 구원자를 뜻한다.

오늘날 대개의 사람들은 예수가 정말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떻게 활동했으며 무엇을 꿈꾸었는지 왜 죽임을 당했는지 따위는 모조리 생략한 채, 그를 단지 교리의 주인공으로만 기억한다. 정말 예수는 단지 교리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그 고단한 삶을 살았단 말인가? 이성으로든 신앙으로든, 예수를 '갈릴래아에서 온 사람'으로 보느냐 '교리 속에서 온 사람'으로 보느냐 하는 것은 예수의 정체성을 선택하는 결정적인 지표가 된다.

예수의 입으로 전해질 하느님 나라는 세례자 요한을 비롯해 대개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던 하느님 나라와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하느님의 심판과 징벌로 만들어지는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이 준비하고 초대하는 잔치 같은 것이다. ... 예수는 '지금까지의 삶의 태도와 방식을 완전히 뒤집을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삶의 태도와 방식을 완전히 뒤집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라'는 말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려면 먼저 내 삶의 태도와 방식을 완전히 뒤집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회개'로 번역된 그리스어 '메타노이아'는 '길을 바꾸다, 되돌아서다'라는 뜻이기도 하다. ... 예수가 말한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의 말로 '새로운 세상'이며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우리의 말로 '세상을 변혁하는 운동'이며 기도는 우리의 말로 '신념을 다지고 성찰하는 시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의 모든 행동은 '모든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애끓는 마음'에서 시작한다. 그의 분노 역시 애끓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 예수가 병자를 고치는 일은 단지 병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이 아니라 그의 잃어버린 인권을 회복시키고 죽음 같던 삶을 회복시키는 일이다.

2장

성전은 단지 성전이 아니라 지배체제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예수는 오로지 율법을 잘 지키는 의로운 사람들에게만 하느님의 사랑이 닿는다고 생각하던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뒤집는다. 예수는 하느님의 관심이 율법을 잘 지키는 경건한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먹고살기 위해선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죄인들에게 있음을 선포한다. 그들이 하느님 나라의 주인공이고 기존의 모든 가치들은 그들을 중심으로 재정리되어야 한다.

사람은 아무하고나 밥을 먹지 않는다. 식사 약속엔 엄격한 사회적 맥락이 들어 있다. 식사에 초대하는 건 그 사람을 내 사회적 관계와 질서 속에 들이는 일이다. ... 누구와 먹는가, 어느 자리에 앉는가 따위는 곧 그 사람의 신분과 명예를 표현했다. ... '우리가 굳은 얼굴로 단식을 해야 합니까? 기쁜 얼굴로 잔치에 참여합시다. 고단한 이웃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며 위로와 사랑을 나누는 일이야말로 하느님의 나라의 모습입니다.'

'쉬는 날'이란 굳이 쉬는 날이 정해지지 않아도 언제든 충분히 쉴 수 있는 사람에겐 큰 의미가 없다. 쉬는 날은 그것이 정해져 있지 않다면 제대로 쉴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다.

3장

바리사이인들은 인민들의 그런 죄의식과 열등감을 기반으로 여느 인민들에게서 자신들을 '분리'하여 품위를 유지했다. 예수는 그 공공연한, 그러나 아직 단 한 번도 문제시되지 않은 억압의 체제에 분노한다. ... 사람은 품위 있는 사람과 품위 없는 사람으로 나뉘는 게 아니라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과 유지할 수 없는 사람으로 나뉘는 것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운동의 진정한 성장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예수는 애당초 운동의 외형적 성장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예수는 오로지 제 운동, 즉 '하느님 나라 운동'의 본디 목적과 내용에만 집중한다. ... 예수가 말하는 하느님 나라는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그 본래 모습을 회복하는 세상이다. 지배와 피지배가 없는, 모든 사람이 차별 없이 서로를 존중하는, 이기심이 아니라 우애에 의해 운영되는 세상이다. 그것은 당연히 다른 사람의 수고와 고통 덕에 안락을 누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품위를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이 인권을 회복하는 일을 기초로 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회복이 세상의 회복이며, 그들이 하느님 나라를 향한 도정에서 주인공인 것이다.

평화란 '온 세상이 잃어버린 조화를 회복하는 것'이다. 억압과 착취와 불평등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유지되는 조용하고 온순한 상태는 평화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악랄한 형태의 폭력이다. 평화는 바로 그 억압과 착취와 불평등이 사라지고 모든 사람이 인간적인 조화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때론 평화를 위한 노력이야말로 때론 가장 소란스럽고 가장 사나울 수 있다.

하느님을 섬긴다는 건,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려 힘닿는 데까지 노력하면서도 미처 하느님의 뜻을 헤어리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 있음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태도이지, 앙상한 교리와 신학을 내세워 자신이 하느님의 권한을 완전히 위임받은 양 구는 태도가 아니다.

4장

씨를 뿌린 사람도 못 알아차리는 사이에 어느새 싹이 돋고 이삭이 패고 마침내 알찬 낟알이 맺힌다고.

변화는 오히려 비현실적인 꿈을 꾼다며 비웃음과 조롱을 받는 사람들,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들의 끈기 있는 노력에 의해 일어난다. 도무지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던, 변화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비현실적이라 느껴지던 세상이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변화한다. 그리고 그 변화로 일어난 혜택은 시나퍼의 그늘처럼 모든 사람, 그들을 비웃고 조롱한 사람들은 물론 그들을 적대하고 탄압한 사람들에게까지 고루 나누어진다. 역사에서 보듯 세상의 변화는 늘 그래 왔고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변화지 않는 것 같은 지금 쉬지 않고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바람을 가라앉히고 파도롤 고요하게 하는 굳은 믿음을 요구한다.

5장

예수는 가난하고 못난 사람들, 죄인, 여성, 아이들이 사람 취급 받는 세상을 구름 위에, 관념 속에 건설하려 한 게 아니다.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안에서, 그 현실을 변화시킴으로써 만들려고 했다. 그 변화는 원하든 원치 않든 당연히 정치적 갈등과 불화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 예수의 변혁은 당연히 정치적인 변혁을 포함했다. 그것을 궁극의 목표로 하지 않았을 뿐.

예수는 '하느님을 잘 믿으면 그에 대한 보상으로 하느님이 축복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은 이미 축복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 그걸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고 말한다. '하느님은 바로 고통과 비참에 빠진 당신 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믿고 힘을 내세요. 하느님은 당신이 어느 누구에게도 함부로 눌릴 이유가 없는 당당한 권리와 자존심을 가진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길 바라십니다.'

6장

인민들은 거의 언제나 지배체제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물들어 있다.

중요한 건 이적 자체가 아니라 그 이적에 담긴 믿음과 소통이기 때문이다. 이적은 하느님이 실은 잘나고 힘센 사람들이 아니라 무시당하고 억압받는 내 편이며 나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는 사건이다. 이적의 기회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그러나 그 믿음과 소통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귀가 닫힌 사람들에게 이적은 없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가진 사람은 오로지 가난한 사람, 즉 이미 가난하거나 자발적 가난을 실천하는 사람뿐이다.

하느님 나라 운동에 임하는 사람은 운동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내가 무엇을 하는가'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쓰이는가'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실제로 그들은 배불리 먹는다. 먹어도 먹어도 음식이 솟아났을 수도 있고 손톱만큼씩 뜯어 나누어 먹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아무리 보잘것없는 것이라도 나누어 먹을 때 함께 만족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 진정한 나눔은 적선이나 자선이 아니라 적선과 자선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다. ... 누구든 제 능력과 개성에 맞추어 정직하게 일하는 것만으로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품위와 자존심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 가려는 노력이다.

사람들은 대개 보고 듣는 것을 믿는 게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것을 믿는다. 믿는다는 건 실은 욕망을 드러내는 또 다른 방식인 것이다.

입만 벌리면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그래서 많은 인민들에게서 양식을 가진 사람들로 여겨지는 사람들, 그러나 절대 자본주의가 극복되길 바라지 않는 '완고한 마음'을 가진 그들이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들, 삶의 막장에 몰려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은 두려움도 의심도 가질 게 없으므로 순정한 믿음을 보인다. 구원에 자격 제한은 없다. 사두가이파든 바리사이파든 이방인이든, 자본가든 노동자든 중산층 인텔리든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리고 결과적으로 구원은 가진 게 없는 사람, 가진 것을 스스로 모두 비운 사람들만의 것일 수밖에 없다.

7장

사회적 비판은 그 사회에서 가장 악한 세력이 아니라 '그 사회의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주요한 세력'에 집중되어야 한다. 그 세력은 두 가지 요건을 갖는다. 가장 악한 세력과 갈등하거나 짐짓 적대적인 모습을 보임으로써 인민들에게 존경심과 설득력을 가질 것, 그러나 그 갈등과 적대의 수준은 지배체제 자체를 뒤흔들 만큼 심각하지 않을 것. 그 두 가치요건의 절묘한 조화가 바로 사회 변화를 가로막는 것이다.

그들은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며, 안정된, 그러나 거부감이 들 만큼은 아닌 경제력을 가진 사람들이며, 상당한 사회의식을 가진 '양심적인 시민들'이다. ... 그들은 언제나 현실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스스로 그런 변화를 위한 노력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그 노력은 대개 현실의 근본적인 변화가 아니라 현실의 외피를 덜 추악하게 만드는 일에 머문다.

예수의 이 말을 뚝 떼어 예수가 사람의 사회적 행동과 사회적 모순의 해결을 무시하고 내면의 문제에만 천착하는 영성가였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건 잘못이다. 만일 예수가 그런 사람이었다면 왜 죽음의 위협을, 그리고 죽음을 당했겠는가? 예수는 문제는 '내 안에만'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내 밖'의 문제에만 집착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위선을 지적하면서 문제는 '내 안에도' 있다. 다시 말해서 문제는 '내 안과 밖에 동시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 세상을 바꾸려면 내 밖의 적과 싸우는 동시에 내 안의 적과도 싸워야 한다. ... 진정한 혁명가는 영성가이지 않을 수 없고 진정한 영성가는 혁명가이지 않을 수 없다. 기도든 명상이든, 하루에 30분도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지 않는 혁명가가 만들 새로운 세상은 위험하며, 혁명을 도외시하는 영성가가 얻을 수 있는 건 제 심리적 평온뿐이다.

8장

제자들이 예수의 말을 못 알아듣는 더 큰 이유는 예수가 이루려는 것과 제자들이 예수에게 바라는 것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 베드로는 오로지 '수난당하고 죽는다'는 말에만 집중하여 반발한다.

예수에게 해방은 이스라엘의 해방이 아니라 그 이스라엘 안에서 인권을 잃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인민들의 삶이 변화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었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참으로 절절한 마음이 있다면, ...

9장

예수는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을 섬기는 일이 곧 가장 숭고한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예수가 '나'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예수에게 내 생각, 내 활동, 내 자존심, 내 명예 따위는 이미 없다. 예수의 관심은 오로지 하나, 하느님 나라 운동이다. 나를 사칭하는 남이라 해도 하느님 나라 운동에 기여한다면 그것은 내가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건 결국 나와 남이라는 구분을 해체하는 것이다. 예수는 나와 남이라는 구분을 해체할 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으며, 나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우리가 삶의 어떤 지점에서 참으로 올바르고 소중한 선택을 할 때 아무것도 잃거나 포기할 게 없다면 누가 그 선택을 피하겠는가? ... 예수는 그런 선택이 올바르고 소중한 것이기에 우리 삶에 손해이더라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그런 선택이 우리 삶에 손해처럼 보이지만 실은 훨씬 낫다고, 이득이라고 말한다.

10장

여자들은 이혼하는 게 아니라 단지 이혼당했다. 이혼당한 여성은 단지 남편에게서만 버려지는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완전히 버려졌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당한 방법'으로 쌓은 부는 사회적으로도 존경받고 교회에서도 하느님의 축복이라 여겨진다. 여기에서 '정당한 방법'이란 '합법적인 방법'을 말한다. 그러나 법이란 한 사회의 지배세력이 자신들의 이해와 정체성을 기반으로 사회 성원들을 강제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공정한 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회 성원의 이해와 정체성이 완벽하게 하나인 사회가 아니라면, 모든 사회 성원에게 공정한 법은 존재하려 해도 존재할 수 없다.

하느님 앞에선 누구든 귀하다. 흑인이든 백인이든 여성이든 남성이든 아이든 어른이든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힘없는 사람이든 권력자든 차별 없이 귀하다. 하느님 앞에서 빈부 격차는 그 자체로 악이다. 그런데 빈부 격차란 왜 생기는가? 고루 나눠 갖지 않기 때문에, 남들보다 많이 가진 사람들 때문에 생긴다. 그러므로 하느님 앞에서 부는 능력과 노력의 결과인가 정당한 방법으로 쌓은 것인가와 상관없이 '가난한 사람이 존재하는 한' 부끄러운 것이다. ...  부가 하느님의 축복이라면 가난은 하느님의 저주가 된다. ... 그런 사고방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가난은 단지 불편한 것이 아니라 부끄러운 게 된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으로 겪는 불편함에 더해 인간적으로 무시당하고 차별받아야 하는 것이다. ... "하느님은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다는 예수의 말은 부자들이 어느 날 자발적 가난을 자유와 기쁨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일을, 사람은 못 해도 하느님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말은 지금 아무리 부자라 해도 그가 언제든 삶을 전복시켜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자, 그러나 그런 가능성은 '하느님이나 할 수 있다고 말할 만큼 쉽지 않은 일'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사람이 자유를 누리가 위해 필요한 부는 생각보다 적다. 그걸 넘어서는 부는 실은 사람에게서 자유와 평화를 앗아 간다. ... 가진 돈과 재산 때문에 사라져 가는 진정한 자유를, 인생의 참 즐거움과 행복을 늦기 전에 되찾길 권유하는 것이다.

현세와 내세는 반드시 시점으로 선후가 갈리는 게 아니다. 현세에 내세가 있고 또 내세에 현세가 있다.

'좋은 지배'를 꿈꾸지 마라, 그런 건 없다. 오로지 섬김만이 있다. 진정으로 인민을 위하고 세상을 위하고 싶다면 섬겨라, 가장 고통스러운 삶의 현장에 함께하라.

11장

예수는 성전이 비판이나 개혁을 통해 달라질 가능성이 없음을, 더 이상 그곳에 하느님이 거하지 않으며 누구도 그곳을 통해 하느님을 만날 수 없음을, 성전의 영원한 죽음을 확인한다.

예수는 억압의 사회체제가 피억압자들의 비굴과 무기력에 힘입어 유지된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 불의한 사회체제를 유지하는 더 근복적인 힘은 바로 인민들의 비굴과 무기력이다.

남보다 많이 갖는 게 축복이 아니라 내 것을 없애서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게 축복이라고 말한다.

예수는 당부하고 또 당부한다. '믿음'을 가지라고. 믿음이란 어떤 대상에게 나를 완전히 여는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란 하느님에게 나를 완전히 여는 것이다. 하느님의 의지와 행동에 거리낌 없이 참여하는 것이다. ... 믿음은 결국 하느님 나라, 즉 근본적으로 새로운 세상이 가능하다는 꿈이다.

20세기 말 이른바 현실 사회주의 패망 이후 우리는 불가능해 보이는 것에 대해 꿈꾸기를 중단하게 되었다. ... 그보다 심각한 것은 이상주의가 사라지는 것이다. 꿈을 잃은 사람에게 아무런 희망이 없듯, 이상주의가 사라진 세상, 모든 사람이 불가능한 것에 대해 꿈꾸길 중단하고 현실적이고 실현 가능해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는 세상엔 아무런 희망이 없다.

일반적으로 뺨을 때린다는 건 오른손으로 상대의 왼뺨을 때리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오른뺨을 때리면"이라고 했다. 손바닥이 아니라 손등으로 때렸다는 말이다. 손등으로 뺨을 때리는 행위는 당시 유다 사회에서 하찮은 상대를 모욕할 때 사용되곤 했다. 그렇게 모욕당한 사람에게 예수는 '왼뺨도 갖다 대라'고 말한다. '나는 너와 다름없는 존엄한 인간이다. 자, 다시 제대로 때려라' 하고 조용히 외치라는 것이다. 무조건적으로 용서하고 순응하라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단호하게 저항하라, 불복종을 선언하라는 것이다.

"여러분이 당장 여러분의 현실을 뒤집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여러분을 무시하고 모욕하는 부자와 권력자들의 편이 아니라 여러분의 편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주인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믿음을 가지세요. 부디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고 자존심을 잃지 마세요." 불의한 사회 현실 속에서 분노와 용서는 늘 균형을 잃곤 한다. 현실에 분노하고 싸우는 사람들은 대개 용서를 모른다. 그래서 많은 경우 증오와 보복의 악순환으로 빠져 들어간다. 한편 용서를 말하는 사람들은 분노할 줄 모른다. 그들의 분노 없는 용서, 진실과 정의를 가리지 않는 무작정한 용서는 불의한 현실을 덮고 그 현실에서 영화를 누리는 세력에게 봉사하게 된다. 그러나 예수에게 분노와 용서는 늘 병행한다. ... 예수는 분명히 분노하며 진실과 정의를 가리지만, 끝내 용서함으로써 증오와 보복의 고리를 끊어 낸다. ... 우리는 끝내 용서하되, 먼저 분명히 분노해야 한다. 진정 분노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진정 용서할 줄도 모르며, 진정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진정 분노할 줄 모른다. 분노와 용서는 실은 하나다.

12장

정교분리 원칙은 교회가 무작정 정치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교회가 지배세력의 일부가 되거나 야합하지 않는다는 뜻을 가진다.

사람이 부활한다는 건 세포덩어리인 몸을 떠나 영원히 살아 소통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가 말한 '진정한 목숨'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다." 즉 사람은 하느님의 본성을 담아 지어졌다는 말이다. ... 하느님을 사랑하는 건 나를 사랑하는 일이자 동시에 모든 나를 사랑하는 일이다.

예수가 말한 이웃 사랑은 예수의 말 그대로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와 남, 내 것과 남의 것을 경계 지어 이루어지는 행위가 아니라 나와 남, 내 것과 남의 것의 경계를 없애는 데서 가능해지는 일이다. 내 것의 일부를 이웃에게 주는 게 아니라 '내 것'을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내 것과 남의 것의 철저한 분리, 즉 엄격한 사유재산 제도를 기본 정신으로 하는 자본주의는 예수의 이웃 사랑에 적대적인 사회체계가 틀림없다. ... 예수의 이웃 사랑은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넘어서는 어떤 것'이다. ... 예수의 이웃 사랑은 문화적이고 정신적인 가치까지 포괄한다.

14장

예수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단위로 사고하지 않고 인권을 박탈당한 인민들을 기반으로 사고했다. 바리사이인들의 개혁 운동은 인민들에겐 또 다른 억압의 체제였으며, 민족 해방운동 세력이 이룰 세상 또한 인민들의 처지에선 아무것도 달라질 게 없었다. 사람들이란 대개 기존의 사회적 갈등의 틀 안에서 저 사람은 어느 편인가, 어디에 속하는가를 따지곤 한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 아군과 적군 따위 모든 것이 그렇게 구분되고 정의된다. ... 예수의 진정한 정치적 혁명은 영적 혁명을 포함하는 것임을, 아니 정치적 혁명과 영적 혁명은 본디 둘로 나누어지지 않는 하나임을 보여 준다.

예수는 그렇게 뿔뿔이 흩어지는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말과 생각을 되새기고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약하고 흔들리는 인간이기에 공포와 번민은 당연하다. 그러나 또한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이기에 그 공포와 번민을 끝내 이겨 낼 수 있다. 우리는 가장 인간적일 때 비로소 신적일 수 있으며, 그래서 우리는 누구나 신적일 수 있다.

비폭력주의의 목표는 '비폭력'이 아니라 '저항'이라는 걸 잊어선 안 된다. 예수는 언제나 폭력의 현장에서 그 폭력을 몸으로 감당하며 비폭력으로 저항했다. ... 진정한 비폭력주의자들이 결국 폭력에 희생당하는 운명을 갖는 건, 지배체제가 그들에게서 무장투쟁을 선택한 운동가들보다 오히려 더 큰 위협을 느끼기 때문이다.

15장

우리는 정치적 혁명성은 '주장'되는 게 아니라 지배체제에 의해 '증명'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 예수가 어떤 사람이었는가에 대한 모든 해석이나 의견을 존중하더라도 절대 생략되어서는 안 되는 게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가 '지배체제에 의해 사형당했다'는 사실이다. ... 예수와 관련한 모든 해석과 의견들은 예수가 '왜 상형당했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 사형은커녕 1년 내내 뺨 한번 맞을 일 없이 안락하게 살아가면서 예수 흉내로 세상의 존경과 명예를 구가하는 건 예수를 팔아먹는 짓이다. 사회적 모순이 존재하는 한, 다들 세상이 좋아지고 달라졌다고 해도 아느 한 귀퉁이엔가 인간으로서 위엄을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예수를 쫓는 사람은 지배체제와 불화할 수밖에 없다.

내가 하느님을 찾는 순간 하느님은 내 말에 귀를 기울인다. 하느님과 소통하는 데 성전도 교회도 제관도 목사도 필요하지 않다. 하느님을 찾는 모든 사람이 제관이며 목사이며 하느님과 소통하는 모든 곳이 성전이며 교회다.

16장

가장 극적인 일은 예수가 잡히자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이 어느 순간 "예수가 부활했다!" 외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를 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의 달라진 모습 사이에 예수의 부활 사건이 있다.

문제는 예수의 부활이 사실인가가 아니라 부활이 무엇인가다. ... 사람은 대개 육체를 사용하는 시간을 목숨이 유지되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 그들은 예수가 말한 '진정한 목숨'의 의미를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가 죽지 않았다고, 영원히 살아 있다고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목숨이란, 살아 있다는 것이란 진정 무엇인가? ... 우리는 예수가 제자들이 그랬듯, 내 삶 속에서 예수가 부활하게 함으로써 영원히 목숨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은 오랜 종교적 수련이나 특별한 구도 행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누구라도, 바로 이 순간에 선택할 수 있는 일이다. ... 2000년 전에 몸은 죽었지만 여전히 우리 곁에서 살아 숨쉬는 예수는 우리에게 묻는다. '목숨이 뭐라고 생각합니까? 정말 살아 있다고 생각합니까?'




지지난주 쯤인가, 갑자기 회사 주소를 부르라는 언니는 '멋진 남자를 한 명 보내주겠다'며 이 책을 보내왔다.
모태신앙으로 태어난지 한달도 안되어서 세례를 받았고, 대학 다닐때까지 한번의 반항이나 의심도 없이 주일이면 성당엘 다녔던 나에게
갑자기 '예수전'이라니, 그것도 '멋진 남자'라고 그래놓고는...

읽고 있었던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이 책을 먼저 집어들지는 않았다.
가톨릭과 다른 기독교 냄새가 느껴져서 썩 내키지 않았고,
그것보다 닳고 닳은, 이젠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 남자 혹은 사람이 아닌 '예수'에 그닥 흥미가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지난 주말, 갑자기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언니가 이 책을 몇몇에게 보내주고 함께 하고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했고,
김규항이 왜 지금 이 시대에 다시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을까가 궁금해서였다.


이 책을 읽으며,
일상과 종교가 분리되어, 딱 그만큼의 '위로' 뿐이라고,
그 '위로'도 이젠 내게 힘이 되지 않으며, 그래서 서서히 잊혀지고 있었던 그분을,
교리에 갖힌 예수가 아닌,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 죽임을 당하고 부활하여 영원히 살아계신 그분을 다시 만났다.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사람들,
지금까지 만나온 수 많은 하느님과, 앞으로 만나게 될 수많은 하느님들을 기대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완고한 마음 속에 갖혀있는 내 안의 하느님도 빨리 만나게 되길 기대하게 되었다.
곧 나의 완고한 마음도 따뜻하게,
들을 귀도 언제나 깨어 열어놓고,
온전히 온 마음과 온 힘을 다하도록...



언니, 너무너무 고마워.
언니가 있어서 난 참 다행인거 같아. 언니가 없었다면 난 휠씬 더 많이 외로웠을 꺼야.
사랑해. 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