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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삶의 사이 ... 남한산성 / 김 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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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 김 훈 / 학고재



- 청병이 오면 얼음 위로 길을 잡아 강을 건네주고 곡식이라도 얻어 볼까 해서......

서날쇠는 연장을 구하러 온 사람의 몸매와 근력, 팔다리의 길이와 허리의 곧고 굽음을 잘 살펴서 남자와 여자, 아이와 노인, 키 작은 자와 키 큰 자의 연장을 달리 만들어주었다. 돌이 많은 땅의 호미와 모래밭의 호미도 달리 만들었다.

... 버티지 못하면 어찌 하겠느냐. 버티면 버티어지는 것이고, 버티지 않으면 버티어지지 못하는 것 아니냐...... 김상헌은 그 말을 아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힘으로 삶을 열어나가는 것이다. 아침이 오고 또 봄이 오듯이 새로운 시간과 더불어 새로워지지 못한다면, 이 성 안에서 세상은 끝날 것이고 끝나는 날까지 고통을 다 바쳐야 할 것이지만, 아침은 오고 봄은 기어이 오는 것이어서 성 밖에서 성 안으로 들어왔듯 성 안에서 성 밖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이 어찌 없다 하겠느냐......

버티는 힘이 다하는 날에 버티는 고통은 끝날 것이고, 버티는 고통이 끝나는 날에는 버티어야 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었는데, 버티어야 할 것이 모두 소멸할 때까지 버티어야 하는 것인지 김류는 생각했다.

어둠에 눈발이 섞여서 돌아봐도 나루터 마을은 보이지 않았다. 아이는 얼음 위에 쓰러진 아비의 시체 곁을 지났다. 시체에 눈이 쌓여 아비를 알아보지 못했다.

밝음과 어둠이 꿰맨 자리 없이 포개지고 갈라져서 날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었다. 남한산성에서 시간은 서두르지 않았고, 머뭇거리지 않았다. 군량은 시간과 더불어 말라갔으나, 시간은 성과 사소한 관련도 없는 낯선 과객으로 분지 안에 흘러 들어왔다. 저녁에 되고 아침이 되니,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었다.

- 여기서 오래 머물기야 하겠느냐.
임금의 말은 시간이 행궁 지붕을 스쳐가는 소리처럼 들렸다. 임금의 말이 아니더라도, 성 안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그 '오래'가 오래지 않을 것임을 민촌의 아이들도 알고 있었다.

길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며, 마음의 길을 마음 밖으로 밀어내어 세상의 길과 맞닿게 해서 마음과 세상이 한 줄로 이어지는 자리에서 삶의 길이 열릴 것이므로, 군사를 앞세워 치고 나가는 출성과 마음을 앞세워 나가는 출성이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먼 산줄기를 바라보면서 김상헌은 생각했다.

- 나는 아무 쪽도 아니오. 나는 다만 다가오는 적을 잡는 초병이오. ... 다만 지킬 뿐이오. 성 안이 날마다 기진해 가니, 오려거든 빨리 왔으면 좋겠소.

- 품계 높은 사대부는 길을 몰라 갈 수 없고, 품계 없는 군병은 못 믿어서 못 보내면 까마귀 편에 보내려느냐.
- 전하, 신들을 죽여주소서.
- 경들을 죽이면 혼백이 날아가서 격서를 전하겠느냐.
......
- 조정의 막중대사를 대장장이에게 맡기시렵니까?
- 민망한 일이다. 하지만 성이 위태로우니 충절에 귀천이 있겠느냐?
- 먹고 살며 가두고 때리는 일에는 귀천이 있었소이다.
......
- 나라에서 하라시니, 천한 백성이 어쩌겠습니까.
 
왕조가 쓰러지고 세상이 무너져도 삶은 영원하고, 삶의 영원성만이 치욕을 덮에서 위로할 수 있는 것이라고, 최명길은 차가운 땅에 이마를 대고 생각했다. ... 시간은 흘러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모든 환란의 시간은 다가오는 시간 속에서 다시 맑게 피어나고 있으므로, 끝없이 새로워지는 시간과 더불어 새롭게 태어나야 할 것이었다. 모든 시간은 새벽이었다. 그 새벽의 시간은 더럽혀질 수 없고, 다가오는 그것들 앞에서 물러설 자리는 없었다. 이마를 땅에 대고 김상헌은 그 새로움을 경건성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당상들이 날마다 어전에 모였다. 내행전 마루에서 말들이 부스러졌고, 부딪쳐서 흩어졌다. 사관은 서안 앞에 앉아서 말하는 신료들의 이 입 저 입을 바라보았다. 사관은 묘당의 말들을 기록할 수 없었다. 저녁 때 사관은 붓을 들어 겨우 적었다. ......임금은 남한산성에 있었다.

- 전하,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는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치욕은 죽음보다 가벼운 것이옵니다. 군병들이 기한을 견디듯이 전하께서도 견디고 계시니 종사의 힘이옵니다. 전하, 부디 더 큰 것들도 견디어주소서.

이시백은 알았다. 봄이 아니라 칸의 문서가 눈구덩이 속에서 겨울을 난 저들을 위로하고 있었다.

동장대 위로 상현달이 올랐다. 숲의 바닥이 환했고 성벽은 달무리처럼 떠보였다.

임금은 살려는 것이었다. 이판과 예판이 다르지 않을 것이고, 당상.당하와 성첩의 군병들과 마구간 노복이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죽을 수도 없고 살 수도 없었지만, 정랑은 글을 쓸 수 없었다. 나라가 없고 품계가 없는 세상에서 정랑은 홀로 살고 싶었다. 정랑의 몸은 남한산성에 있었다.

임금은 서안 앞에 곧게 앉아 있었다. 승지가 눈을 들어 임금을 바라보았다. 촛불에 임금의 그림자가 흔들렸다. 승지의 눈에는 이 세상에 임금이 홀로 앉아 있고, 임금의 그림자가 홀로 살아서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숨이 끊어질 때까지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었다. 성 안에 들어와서 견디어 낸 날들에 비하면 죽음에 이르는 시간은 견딜 만하리라. 그 짧은 동안을 견디면, 무엇을 부술 수 있고 무엇을 부술 수 없는지 선명히 드러날 것이었다. 그 지난한 것들의 가벼움에 김상헌은 안도했다. 삼전도로 가는 임금의 발 아래 시체를 깔아 놓고 시체가 되어 임금을 전송해야만 세상의 길은 열릴 것이었는데, 임금의 출성이 임박했으므로 일을 서둘러야 했다.
- 때가 되었다. 나는 죽으니, 너희는 그리 알라. 너희는 방 밖에 정히 앉아서 나를 보내라.
... 임금은 서문에서 삼전도로 가는 산길을 생각했다. 산길은 떠오르지 않았다. ...상헌이 나를 보내주려 하는구나...... 상헌이 나를 배웅하는구나......
... 아직 죽을 때가 오지 않았음을 김상헌은 알았다. 김상헌의 몸은 남한산성에 있었다. 죽기 전에 감당해야 할 일이 남한산성에는 남아 있었다. 묶여서 삼전도로 끌려가서 거기서 적의 칼에 죽는다면, 아마도 사공이 죽은 자리에서 가까울 것이었다.
- 알았다. 당분간 살아 있으마. 미음을 가져와라.

민촌은 술렁거렸으나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고요했다.

조선 왕이 구층 단 위를 향해 절했다. 세자가 왕을 따랐다. 조선 기녀들이 풍악을 울리고 춤추었다. 기녀들의 소맷자락과 치마폭이 바람에 나부꼈다. 풍악 소리가 강바람에 실려 멀리 퍼졌다. 홍이포가 터지고, 청의 군장들이 여진말로 함성을 질렀다. 조선 왕은 오랫동안 이마를 땅에 대고 있었다. 조선 왕은 먼 지심 속 흙냄새를 빨아들였다. 볕에 익은 흙은 향기로웠다. 흙냄새 속에서 살아가야 할 아득한 날들이 흔들렸다. 조선 왕은 이마로 땅을 찧었다.
...
- 아, 잠깐 멈추어라.
조선 왕이 절을 멈추었다. 칸이 휘장을 들치고 일산 밖으로 나갔다. 칸은 바지춤을 내리고 단 아래쪽으로 오줌을 갈겼다. 바람이 불어서 오줌 줄기가 길게 날렸다. 칸이 오줌을 털고 바지춤을 여미었다. 칸은 다시 일산 안으로 들어와 상 앞에 앉았다. 칸이 셋째 잔을 내렸다. 조선 왕은 남은 절을 계속했다.

민촌의 노인들이 성첨으로 올라와서 봄나물을 캤고, 군병들이 버린 옷가지와 가마니를 거두었다. 빈 내행전 마루에 다람쥐가 뛰어다녔다. 성 안에 봄빛이 가득했다. ... 물 위에 어른거리는 길들을 바라보면서 김상헌은 성 안에서 목을 매달았을 때 죽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김상헌은 남은 날들이 아까웠다.
- 가서 최명길에게 안부 전하시오.

백성들이 날마다 몇 명씩 성 안으로 돌아왔다. 봄농사를 시작하기가 너무 늦지는 않았다.




그렇게도 유명한 김훈 선생님의 글을
남한산성으로 처음 읽었다. 칼의 노래도 현의 노래도 자전거 여행도 읽어보지 않고,
원영언니의 남한산성에 대한 찬사에 이끌려, 읽기 시작했는데,
솔직히 읽는 내내 좀 답답했다.
남한산성에 깃든 역사가 그러해서 그런가...
작금의 상황과 총칼만 없을 뿐, 다름이 없다 느껴서일까...

그때는 임금도 신하도 장수도 백성도 뜻은 하나였던거 같은데...
지금은 정부가 적인지 아닌지조차 불분명해서 그런지...
그때는 슬프긴 했지만, 그래도 아름답다는 말에 공감할 수 있지만,
지금은 절망스럽고, 더러울 뿐이라 그래서 읽는 내내 답답했을 수도...

그때나 지금이나 역사 속에 살아가는 개인에게는
농사를, 삶을, 일상을
무탈하게 유지하면 그것으로 태평성대일텐데,
우리에게 태평성대는 과연 올 것인가.
4년 8개월은 도저히 못 버티겠다.

오랜만에 남한산성이나 한 번 다녀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