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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듣고/책장.넘기는.소리

낯설게 보기의 아픔 ... 호모 코레아니쿠스 / 진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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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코레아니쿠스(Homo-Coreanicus)
: 인간 개조에서 토털 키치까지 | 미학자 진중권의 한국인 낯설게 읽기
진중권 / 웅진 지식하우스


보수성은 이론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대부분 이론의 반성 없이 습관으로 존재한다. 더 이상 있을 이유가 없는데도 그저 익숙하기 때문에 집요하게 존속하는 폭력들이 있다. 그것을 없애려면 우리 주위의 익숙한 모든 것들을 한 번쯤 낯설게 볼 필요가 있다. 한국인의 신체는 고통 받고 있다. 하지만 고통도 익숙해지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법. 적어도 한 번쯤 낯설게 보기를 통해 한국인의 신체가 어떤 고통을 당하는지 느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권력이 국가에서 시장으로 넘어가면서 과거에 국가에 바치던 공적 충성의 의무가 한국과 일본에서는 고스란히 회사에 대한 사적 충성으로 옮겨졌다. ... "나는 왜 사소한 것에만 분노하는가?" 어느 작가는 이렇게 물었다. 몰라서 묻는가? 거대한 것은 우리에게 분노할 자유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뭔가에 가로막힌 물이 제 갈 길을 찾아 우회하듯이, 분노의 흐름도 도전을 허용하지 않는 거대한 것을 피해 사소한 곳으로 흐를 수밖에.

'국가주의 코드' '시장주의 코드' '보수주의 코드'

'삶을 위해 일하는 문화'가 아니라 '일을 위해 사는 문화' ... 서구 사회의 느림은 게으름도 아니고, 비효율도 아니고, 경쟁의 배제도 아니고, 역동성의 결여도 아니다. 그저 속도의 다른 차원일 뿐이다. 그리고 삶은 전쟁이 아니다.

미래의 이익(interest)을 위해 순간의 격정을 억누르고 냉정하게 계산하는 근대인. 그런 인간을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라 부른다. ... 호모 에쿠누미쿠스는 결국 소유를 실현하기 위해 모든 풍부한 정념을 희생해버린 존재다.

이성적 존재가 되려면 되도록 '감각으로부터 우리의 정신을 분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 전근대의 정감적 인성과 근대의 합리적 인성. ... 한국처럼 근대화가 압축적으로 잔행된 사회에는 종종 전근대와 근대의 시간 축이 공시적으로 존재하게 마련이다. 이른바 '황빠'와 '황까'의 대결은 두 가지 시간의 대립이요, 두 가지 인성의 대립이다. ... 한국 사회는 이념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균열되어 있다.

졸부 근성을 지닌 상류층은 정신적, 문화적 격조가 아니라 아무나 살 수 없는 값비싼 '명품' 등으로 신분적 차이를 드러내려 하고, 대중은 경제적으로 무리를 해서라도 똑같은 명품을 구입하여 그 차이를 지우려 한다. 대한민국의 명품 문화는 취향의 표현이라기보다는 그 성격이 조선 후기 체면 문화를 상업화한 것에 가깝다. 한국식 자본주의의 천민성은 여기서 비롯된다.

한국에서는 위계적 사고가 언어 속에 뿌리를 박고 있다. ... 예절을 바라보는 수직적 관점과 수평적 관점은 정면으로 충돌한다. 수평적 예의는 수직적 무례로 간주되고, 수직적 예의는 수평적 무례를 낳는다.

늘 과도한 자극에 노출된 감각은 둔감해져 웬만한 자극에는 아예 불쾌감조차 느끼지 못한다. ... 자극의 강렬함과 반응의 강렬함. 한국은 뜨겁다. ... 과도한 자극은 감각기관을 파괴한다. 그것은 감각의 분화와 위계를 파괴하여 모든 감각을 그 원초적 상태, 즉 촉각으로 되돌린다.

아이가 사회로 나가는 것을 한국인은 '출세'로 이해한다. 가정에서 아이를 사회로 내보낼 때 중시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서로 편하게 더불어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남들의 위에 서느냐' 하는 것. 한마디로 사회화를 '공공의 규칙'이 아니라 특권적 지위의 문제로 사고하는 것이다. 그래서 떠드는 아이들을 제지하다가는 부모로부터 '당신이 뭔데 우리 아이 기를 죽이느냐'는 항의를 받게 된다. ... 한국에서 어른들은 아이만큼 유치하고, 아이들을 어른들마큼 노회하다.

죄책감의 문화는 유일신교에 문자문화의 산물인 내면화가 겹쳐질 때 성립하는 반성(reflexion)의 문화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 일본의 역사 왜곡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 다만 과거에 자신들이 했던 일이 드러나는 데에서 '수치심'을 느낄 뿐이다. ... 일본의 과거에서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들은 일본의 과거에서 '죄책감'을 느끼는 양심의 목소리를 '자학사관'이라 부르곤 한다. ... 한국과 일본의 주체 형성이 신 앞에 선 단독자로서 자기반성의 능력을 갖춘 '개인'의 형성이 아니라, 공동체 속에서 남들의 눈길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성원'의 형성으로, 때로는 연대로만 책임을 지는 '대원'의 형성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 이런 의미에서 윤리를 형성하는 감정은 죄책감이 아니라 수치심이다. 신 앞에 떳떳하지 않은 이도 사람들 앞에선 부끄러울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성범죄의 신고율이 낮은 것은 아마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수치심을 느끼는 것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 이렇게 윤리가 타인의 눈에 맞춰져 형성된 사회에서는 죄도 드러나지 않는 한 떳떳하고, 죄가 아닌 것도 드러나는 한 부끄러운 것이 된다.

정치 성향과 관계없이 '심리적 태도'라는 면에서 평균적 한국인은 철저한 보수주의자라는 것. ... 한국인의 무의식에 깔린 더 큰 공포는 다른 데서 온다. 사회적 안전망의 결여, 지나친 경쟁의 강조, 점증하는 고용의 불안정성이야말로 한국인들이 가진 공포의 주된 근원이다. ... '그냥 사느냐, 더 잘 사느냐'의 문제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가 되는 곳에서, 사람들은 창의적으로 새 영역을 개척하기보다는, 이미 안전한 것으로 입증된 낡은 습관을 고집하게 된다. ... 과거에 한국인의 심성을 지배한 것이 '전쟁'의 공포였다면, 오늘날 한국인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시장'의 공포다. ... 생존의 공포는 개개인에게 '동일성(identity)'에 대한 열망을 낳고 결국 모두의 획일성으로 실현된다. 놀이의 기쁨은 '차이(difference)'에 대한 욕망에서 나와서 혁신과 창안으로 이어진다.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 창의성이 생기지 않는다. 한국에서 창의성의 결여는 두개골 용적의 한계가 아니라 신체 전체의 한계. 그것은 인식론적 현상이 아니라 이제까지 한국인이 살아온 역사를 반영하는 존재론적 현상이다.

실재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가상이 드러서는 '시뮬라시옹'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 남이 하는 일에 과도하게 관심을 갖고, 부도덕한 자를 찍어 집단으로 조리돌림을 하고, 냉정하게 사실을 확인하기 전에 뜨겁게 '감동'부터 받고 싶어하는 이야기 문화는 전근대적 심성에 속한다.

문자문화에서 인터넷은 정보의 교류를 위한 망이나, 구술문화에서 인테넷은 관계 맺음의 망으로 기능한다. ... <문자문화와 구술문화>에서 월터 옹(Walter J. Ong)은 구술문화에서 대화는 '감정이입적' 성격을 띤다고 지적한다. 실재로 한국에서 논쟁은 '이성적'이라기보다는 '정서적'이며, 판단은 '논리적'이라기보다는 '감정이입적'이다.

발터 벤야민은 이미 '산만함'을 현대적 지각의 특성으로 들었다. ... '개인'이라는 말은 in+dividual, 즉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단위라는 뜻이다. 하지만 컴퓨터에 여러 개의 창을 열어놓을 때, 정신은 다양한 관심사로 분할이 된다. 이로써 전통적 의미의 '개인'은 해체된다.

21세기의 기술은 과거의 기술과 달리 '꿈꾸는 기술'이다. 꿈이 기술을 통해 현실이 되면, 기술은 예술이 되고, 상상력은 생산력이 된다. '꿈꾸는 과학 예술가'는 기술과 예술과 인문학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디지털 유리할 유희의 명인이다. 카리스마의 명령에 따라 몸을 움직이는 군대식 신체가 아니라, 스스로 발명하고 창안하는 예술적 신체다.

이른바 '판타지 사극' 속에서 이미 있었던 사실(past)과 아직 없었던 환상(future)이 하나가 되어 시청자의 눈앞에서 시각적으로 현재화(present-ation)한다. 세 시간대의 공간적 융합 속에서 화살처럼 날아가는 선형적 시간의식은 무력해진다. 이는 역사주의에 기초한 진보의 위기다. 정치의식, 역사의식의 결여라는 신세대의 보수성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어떤 것이 '사실인 것'과 어떤 것을 '사실로 믿는 것'은 다르다. 대중들 역시 가상이 현실이기를 원했고, 이 대중적 염원이 매체들로 하여금 연극을 졸지에 현실로 둔갑시키게 했던 것이리라.

아우라의 파괴는 전면적이다. 교회에서 경건함에 젖고, 사찰에서 엄숙함을 느끼며, 자연이 내뿜는 숨결을 느끼고, 자연이 지르는 비명소리를 들으며, 유적에서 과거의 영욕을 느끼고, 거기서 보전해야 할 세계를 보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모든 신성과 모든 생명과 모든 문화는 슈퍼마켓 진열장에 나열된 깡통처럼 얼마든지 반복 가능하고, 얼마든지 복제 가능한 상품이 된다. 그러고 보니 대한민국은 교육부를 동시에 인적자원부로, 문화부를 동시에 관광부로 부르는 나라다.

백치미를 가진 것과 백치미를 연출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명품 밝히는 여성 '인' 것과 그런 여성 '인 척하는' 것 역시 전혀 다른 일이다. 문제는 낸시에게서는 이 두 차원이 잘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 그의 존재가 주는 당혹감은 여기서 비롯된다. 많은 이들은 낸시의 경우 전자에 가깝다고 믿는 모양이다. 하지만 누가 아는가? 사람들이 그렇게 믿는 것까지가 그의 전략일지. 아니면 이미 그는 그런 구분 자체가 의미가 없어진 시대에 가 있는지.



신간 광고를 보고 바로 샀는데, 본사 사무실 책장에 꽂아놓고 여태 못읽었었다.
며칠전 오랜만에 본사에 갔다가 약속 시간이 남아서 읽기 시작했는데,
읽는 내내 불편했다.
'정말 그렇구나'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고,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라고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고,
'난 아니야' 라고 애써 외면하는 부분도 있었다.

일을 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닌, 삶을 위해 일하고,
수직적 예의와 함께 수평적 예의를 구분하며,
나 혼자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야 하고,
남의 눈에 의한 수치심이 아닌, 자기 반성에 의한 죄책감을 느끼며,
정서적 논쟁이 아닌 이성적 논쟁을, 감정이입적 판단이 아닌 논리적 판단을 하고,
사실인 것과 사실인 척하는 것을 구분하며,
복제해서는 안되는 것들을 지킬 수 있는
철학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근데, 너무 어렵다. 어떻게 해야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