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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듣고/책장.넘기는.소리

평소보다 약간 더 따뜻한 상태의 온기 ...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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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 김연수 / 문학동네



사랑은 모든 인류를 유일한 존재로 만들고, 또 그러므로 이 우주는 유한할 수밖에 없다.

가장 육체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사랑은 그런 온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평소보다 약간 더 따뜻한 상태. 하지만 한 인간에게는 다른 사람의 몸에서 전해지는 그 정도의 온기면 충분했다.

어두운 밤하늘에 수많은 전파들이 존재하듯, 외롭다고 느끼는 바로 그 순간에도 수많은 이야기들이 세상을 가득 메우고 있을 것이라고 정민은 생각했다.

사랑은 입술이고 라디오고 거대한 책이므로. 사랑을 통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내게 말을 건네므로. 그리고 이 세상 모든 것들이 그 입술을 빌려 하는 말은, 바로 지금 여기가 내가 살아가야 할 세계라는 것이므로.

이처럼 지금의 사람들이 핸드폰, 블로그, 검색, 이메일 같은 단어를 쉽게 접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시절의 사람들은 총격, 수류탄, 폭격, 사살 등의 단어에 노출돼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시절의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불행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건 행복과 불행의 문제가 아니라 습관의 문제였다. 습관이란 무의식중에 행하는 행동을 뜻한다. 폭력이 몸에 밴 사람은 폭력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리고 바로 그 '인식하지 못함'이 그가 속한 세계를 폭력적으로 만든다.

밤마다 텅 빈 우주공간을 바라보며 우리만 살기에는 상당히 넓다고 생각해본 사람만이, 그래서 어딘가에서 날아올지도 모를 신호를 기다리며 전파망원경을 이리저리 돌려본 존재만이 그 레코드판을 들어볼 생각을 할 거야. ... 우리는 자신과 가장 닮은 사람과 연결되는 거야.

새로운 삶을, 새로운 현실을,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자신의 이름을 거부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야. 그래서 나는 망명이란 이름으로부터 도망치는 일이라고 생각해. 잔인한 현실을 꿈으로 만들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으니까. 현실을 꿈으로 만드는 첫번째 단계는 자신의 이름을 부정하는 일이야.

인생이 이다지도 짧은 건 우리가 항상 세상에 없는 것을 찾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라.

살아오는 동안, 그를 위해 슬퍼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까지 그는 그 누구의 슬픔도 아닌 사람이었다.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린 사람은 한기복이 처음이었다.

나는 행복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 행복을 찾기 위해 나는 온 세상을 떠돌아다녔으니까. 거기가 환하다는 이유만으로 마당에서 잃어버린 바늘을 찾는 물라 나스루딘처럼. 찾아내는 순간, 그간의 모든 노력이 무가치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그 보물을. 찾아내는 순간, 나의 인생이 더없이 짧다는 사실만을 가르쳐줄 뿐인 그 보물을. 그리하여 내가 찾는 진정한 보물이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만을 가르쳐줄 뿐인 그 보물을. 어떻게 된 일인지 내 소망이 녹아들었음에도 그 꿈이 내게는 슬펐다.

사랑은 누구에게나 하나씩 있는 것이므로 관심만 기울이면 서로 이해하지 못할 바가 없었다.

나는 다만 묻고 있을 뿐이야. 나만의 방식으로 모두에게 묻는 거야. 우리의 삶은 과연 다른 인류에게 기억될 만한 값어치가 있었는가. ... 존재가 없다면 다만 고통만 사라질 뿐인가? 그들의 부모는? 아내는? 아이들은? 그렇다면 캠프에서도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가 웃을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 그건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야.

나는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던 그날부터 역사는 실시간 중계되기 시작했다고 생각해. 그렇게 되기 시작하면 우리는 눈을 떼지 못하고 시청할 수밖에 없는 거잖아. 그게 자본주의의 미디어가 하는 일이야. 우리를 역사의 시청자로 만드는 것.

하루에 사십이해일천이백만경 번 이산화탄소를 배출해내는 인간들로 가득 찬 이 지구에서도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까닭은 이 180이라는 숫자 때문이다. 인간만이 같은 종을 죽이는 유일한 동물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만이 웃을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이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180이라는 이 숫자는 이런 뜻이다. 앞으로 네게도 수많은 일들이 일어날 테고, 그중에는 죽고 싶을 만큼 힘든 일이 일어나기도 할 텐데, 그럼에도 너라는 종(種)은 백팔십 번 웃은 뒤에야 한 번 울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는 얘기다. 이 사실을 절대로 잊어버리면 안된다.

"믿을 수 없다고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죠."
"물론이죠. 그래서 두려움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니까. 정민의 삼촌이 품게 된 몽상도 거기서 비롯했죠. 간단한 몽상이었어요. 과연 이 세계뿐인가? ... 바로 이 무렵에 중앙전신국에서 수류탄이 터지는 것을 직접 봤고, 청원경찰에게 폭행을 당하죠. 문제는 그게 우연한 폭행이었다는 점이었어요. 폭력에 관한 한 제비뽑기를 하는 사회인 거죠."

광주항쟁은 모든 것을 바꿔버렸다. 광주항쟁은 남한에 있는 모든 젊은이들을 우연한 존재로 만들어버렸다. ... 누군가는 그들에게 이게 우연한 세계가 아니라는 걸 증명해야 했는데, 아무도 그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유 없이 외로움에 시달리는 것보다는 누군가가 그리워서 외로움에 시달리는 편이 훨씬 더 낫다는 걸 나는 그때 알았다. ... 그해 가을, 나는 짐승처럼 한 인간의 체온이 그리웠다. 그리움의 본질은 온기의 결여였다.

그건 미안한 게 아니고 후회가 되는 일이지.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안나와 더 많이 사랑할 거야. 더 많이 키스하고 더 많이 포옹하고 더 많이 섹스할 거야. 아직 우리가 사랑할 수 있을 때, 더 많이.

어둠 속에 머물다가 단 한 번뿐이었다고 하더라도 빛에 노출되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평생 그 빛을 잊지 못하리라. 그런 순간에 그들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됐으므로, 그 기억만으로 그들은 빛을 향한, 평생에 걸친 여행을 시작한다. ... 죽지 않는 한, 그는 살아남기 위해서 시시각각으로 열망할 테고, 그 열망이 다시 그를 치욕스럽되 패배하지 않는 인간으로 살아남게 할 테니까 말이다. 그가 살아남기를 열망했듯이 우리가 살았던 그 시절 역시 살아남기를 열망했다. 그 열망은 그의 것이기도 했고, 서서리 무너진 뒤에도 오랫동안 잔영이 남아 있던 그 시절의 것이기도 했다.

할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정확하게 아는 건 우리가 아니라 그 입체 누드사진 같은 사물들일 뿐이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책 표지에 있던 김연수라는 작가의 추천사를 보았을 때는
김연수란 사람이 누구지 했었다. 그가 작가라는 것도 몰랐을 때.
얼마전 어느 인터넷서점의 뉴스레터에서 유명작가들이 추천하는 책에 관한 내용이 있었는데,
그때 김연수란 사람이 작가라는 사실을, 그것도 유명작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언니들에게 물어본 결과, 정말 유명한 작가이며, 그의 글들이 읽어볼만하다는 말을 듣고 주문한 책이 이 책이다.

역사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얘기를
나와 몇년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는 작가의 시점에서
녹녹치 않았던 우리 현대사의 사건들과 함께 잘 풀어놓았다.
역사와 개인은 각각 제각각 따로 떨어져 외로운 것 같아도,
눈에 보이지 않는 실로 얼기설기 짜여,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러니 '아직 우리가 사랑할 수 있을 때' '평소보다 약간 더 따뜻한 상태'의 온기를 나누며 살자는...

원영언니가 추천해준 '청춘의 문장들'을 읽어야겠는데,
인터파크에선 품절. 오랜만에 서점가서 책 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