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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나 뒤돌아보기 ... 나의 아름다운 정원 / 심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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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정원 : 제7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 심윤경 / 한겨레신문사



엄마는 오로지 침묵만이 살 길인 양, 말 못하는 두부 덩어리인 것처럼 웃지도 울지도 않는 늘 하나뿐인 표정으로 7년을 살아왔다.

우리 식구들은 아무도 서로에게 애정을 표현한 적이 없었다. ... 영주의 갑작스런 행동을 처음 접했을 때 우리 식구는 모두 몹시 당황했다. 그리고 곧 그 신기한 행동에 걷잡을 수 없이 매료되었다.

이럴 때 서로 꾹 참고 조용히 넘어가는 법이 우리 집에는 절대로 없었다.

잠시 후 목욕물에 얼굴이 뽀얗게 부풀어오른 할머니가 들어섰다. 엄마는 다시 무표정한 가면으로 돌아갔다. 개다리소반에는 다시 밥과 김치찌개와 냉장고에 있던 묵은 반찬들이 차려졌다. ... "그래, 내가 그릇 찾아다놓고, 입단속시킬께. 떡 얻어먹고 또 야단까지 맞게 하면 되나. ... 그래 걱정 놓고, 얼른 다녀와. 아이구 노친네 그렇게 까탈이 심하실까."

"사실은요, 창피할 때도 있는데요, 제가 3학년 되도록 글씨도 모르는데 동생은 아직 어린데 다 아니까요, 저는 사실 창피한데요, 음음......, 엄마랑 아버지랑 되게 좋아하시거든요......, 할머니도 좋아하시구요, 동생이 글씨 읽고 나서는 엄마랑 아버지랑 한 번도 안 싸우셨어요. 얼마 전에는 엄마가 아버지 구두를 닦아놓으셨는데 제가 뛰어나가다가 밟아서 발자국이 났거든요, 그래서 할머니가 저더러 왜 어린 동생만도 못하냐고 그러셨는데요, 할머닌 원래 맨날 그러시니까 괜찮아요." ... 사실 나는 할머니한테 '영주 밑딱개'라는 말을 하도 많이 들어서 기분나쁠 것도 없었다. 그건 할머니가 나를 부를 때 꼭 이새끼야라고 부르는 것과 하나도 다를 게 없는 일이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면 아무 문제가 없는, 할머니가 노상 입에 달고 사는 말일 뿐이었다. ... 선생님이 물으시는 대로 조심스럽게 대답을 하면서 나는 뜻밖에도 후련한 감정을 느꼈다. 나에게 이런 이야기들을 물어본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 다들 착하고 똑똑한 영주, 미련 맞고 덜렁대는 동구라고만 생각했다. 커튼을 젖히고 무대 뒤편으로 가보면 그곳에는 아직 어리고 미숙한 영주, 생각 깊고 마음 넓은 동구가 있었다. 선생님이 지금 처음으로, 어두운 무대 뒤편에 쪼그리고 있는 착하고 멋진 나를 무대 위로 불러내려는 순간이었다.

아버지가 엄마를 좋아한다고?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버지가 엄마를 좋아한다면 그렇게 무심하고, 엄마의 약점을 가차없이 찌르고, 가끔 두들겨패기까지 할 턱이 없었다.

선생님이 어느 날 저녁, 웃는 얼굴로 나의 세상을 가득 채우고 하신 말씀이었다.

ㅁ은 '마음' 선생님은 내가 좀 수줍어하면서 "마음이요."라고 대답했을 때 좀 마땅치 않은 표정을 지으며 "동구야, 눈에 보이는 물건이 좋아. 마음 같은 건 보이지 않으니까 나중에 생각이 잘 안 날텐데."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바꾸고 싶지 않았다. 마음이 왜 눈에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내 마음은 박 선생님과 똑같이 생긴, 눈에 보이는 '물건'이었다.

"나는 그게 안 쏘는 탱크인 줄 알았어요!"

선생님은 나를 보자 약하게 꿀밤을 때렸다. 아니 때리는 시늉만했다. 내 이마에 선생님의 오른손 가운뎃손가락 가운데 마디가 닿자, 물리적 접촉이 일종의 텔레파시의 매개 역할을 하는지 왜 이틀이나 학교를 안 왔니, 아픈 건 다 나았니, 선생님 보고 싶지는 않았니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나는 다시 공부 못하는 돌대가리 한동구가 되어 아무의 눈길도 받지 못하며 교실에 있는 65개 책상의 한 칸을 차지한 한 덩어리 까만 머리통으로 지내게 될 것이다.

나는 울면서 집에 돌아와 엄마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내가 도대체 얼마 동안 1학년이었던 거냐고 물어보았다. 엄마는 "1년"이었다고 대답했다. 나는 그때 1년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를 확실하게 알았다. 나는 우리 반 친구들과 거의 평생을 같이 산 것처럼 느꼈었는데 그 엄청나게 긴 시간을 사람들은 "1년"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할머니는 평소엔 꽤나 깔끔을 떨지만 다 같이 외출할 일이 생기면 굳이 자신이 홀대받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가장 초라한 옷을 골라 입었다. 엄마의 깔끔한 인생에 할머니는 거의 재앙과도 같은 천적이다.

나는 섭섭한 마음을 애써 누르고, 선생님께 진심으로 고개 숙여 인사한 후 <세계동물도감>을 받아들고 점퍼, 저고리, 내복의 소매가 차례로 푹 젖도록 하염없이 울면서 집에 돌아왔다.

나는 집에 돌아와 매우 울적한 상태로 여러 시간 동안 방에 틀어박혀 있었지만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 오늘만 거지 같은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아주 오랜 시간동안, 계속적으로, 벗어날 수 없는 거지 같은 날들이 계속되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 사람들은 이런 걸 가지고 '절망'이라고 부르는게 아닐까.

"웃으니까 훨씬 보기 좋구나. 어린 애들은 울든지 웃든지 해야지, 영감처럼 고민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으면 영 당황스럽거든."

"선생님, 저도 다 큰 어른이면 좋겠어요.!"

나는 담요를 뚤뚤 말아 고치를 틀고 어두운 동산 같은 삼촌의 등허리를 바라보며 시간을 흘려보내다가, 어떤 날은 집에는 영주가 있고 학교에는 박 선생님이 있는 것처럼 태연하게 삼촌과 저녁까지 먹고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문득, 지금 아버지가 나에게 한 말들도 아버지의 생각을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아버지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아버지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절대적인 권위가 오늘날 우리 가족 누구에게도 힘이 되지 못하고, 아버지가 애써 생각해낸 위로의 말이 엄마의 병을 낫게 하지도 못하고, 아버지가 애써 생각해낸 위로의 말이 엄마의 병을 낫게 하지도 못하고, 아버지가 마지막까지 믿었던 할머니가 저렇게 한심한 모습으로 자신의 모습을 책임지지 못하는, 아버지가 한 번도 그러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끔찍한 무력함일 것 같았다.

어른들은 어른들의 방식으로 살아간단다. 네 힘으로 당장 고칠 수는 없어. 중요한 건 네게 나중에 그런 일이 생겼을 때 잘 하는 거야.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망설임 없이 이 한 몸을 던질 것이라 약속할 수 있지만, 어리석은 나는 몸을 던져 그들을 지켜야 했던 순간이 언제였는지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하나씩 하나씩 그들을 잃어갔다.

'누군가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할 때는 그 사람이 왜 저러는걸까 하는 생각을 해봐. 모든 행동엔 이유가 있지 않겠니.' 행동의 이유를 생각한다. 앞으로 내가 명심해야 할 새로운 원칙이었다.

"이 집에 있으면 자꾸 생각이 나요." 아버지는 나의 대답에 깊이 공감했다. 이 집에 사는 한, 우리 중 누구도 영주에 대한 많은 환청과 환각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 아버지는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고 밥을 다 먹었다. 상처를 감추기 위해 태연한 척 애쓰는 맹수 같았다.

"지가 아파봤자 패륜을 당한 나보다 아팠겠냐만, 너 나 몰래 니 에미 보거든 이제 들어오라고 해. 아까운 병원비 축내지 말구. 저두 새끼 잃고 눈깔이 뒤집어져서 한 짓이라고 생각하구 내가 한 번만 봐줄 테니. 니 에미 오면 모실 동생이 준 그 달구새끼나 잡아서 푹 과야겠다. 온 식구가 국물이라도 마시고 나면 겨울 나기가 한결 수월하겠지. ... 야 이새끼야. 너는 니 에미라고 니 에미 잘난 줄만 알지? 니 에미는 그까짓 달구새끼 한 마리 못 잡아. 귀하게 자라신 몸이라구 웩웩 토하는 척이나 하구. 달구새끼 목 따구 털 뽑구 배 갈르구 다 내가 할 일이여. 너 봄가을루다 기생충 검사한다고 학교에서 똥 덩어리 떼어오라고 할 적에, 그거 잘난 니 에미가 해줬냐 내가 해줬냐? 니 에미는 만날 천날 새끼 위하는 척만 하지 드러운 꼴은 처다도 못 보는 위인이여. 잘난 척만 했지 세상 쓸데없는 게 니 에미여. 그거나 알아둬, 이 새끼야."

나와 노루너미에 가서 살자는 말에 흐뭇해서 할머니가 마음을 돌린 것인지, 아니면 원래 오늘쯤 못 이기는 척하고 엄마를 용서할 생각이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어제까지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 같던 일이 오늘 현실로 일어났다.

삼층 집 정원의 아름다움은 추운 날씨나 하늘을 찢는 번개도 끄덕 없이 이겨낼 수 있는 강건한 것이지만 시멘트 한 줌, 어느 난폭한 손목의 돌팔내질 한 번이면 곧바로 상처입을 수 있는 여리디 여린 것이기도 했다.

만세를 부르는 엿장수 아저씨를 서로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았던 할머니와 모실 할머니처럼, 영주와 나와 박 선생님은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해 있지만 지금 같은 새를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난 기본적으로 어느어느 문학상 수상작 이라고 나오는 책을은 잘 읽지 않는 편이다.
수많은 영화제와 수많은 문학상과 수많은 시상식들에서 수상을 받는 작품들이
순수하게 작품만으로 평가받는 것이 원칙이나,
그렇지 않은 경우들이 아주 간혹, 어쩌면 그것보다는 더 자주 일어난다는 걸,
나도 모르는 사이, 이러저러한 평론과 이러저러한 기사와 이러저러한 소문들을 통해서 알아버렸고,
그래서 어떤 상을 받은 작품이라도 나에게 그 순수성을 인정받기란 쉽지 않았기 때문에,
구지 내가 힘들여 그 순수성을 인정해야하는가라는 생각보다는
내가 순수성을 인정하든말든 그들과는 아무 상관없을 것이기에,
나도 구지 힘들여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이 책도 이런 작품이 있었는지, 이런 작가가 있었는지 전혀 모른 상태로 있다가
얼마전 언니가 권해줘서 받아든 몇권의 책들과 함께 우리집에 오게 되었고,
언니가 준 몇권의 책중에서도 제일 마지막으로 읽게 되었다. (서론이 너무 길군. ㅋ)

읽는 내내 아빠가 인쇄소를 하던,
가정집이랑 인쇄소랑 같이 연결된 망우동의 그 집이 생각났고, 할머니도 생각났다.
가끔 할머니가 집에 와 계시면 엄마와 아빠는 가끔 혹은 자주 싸웠고,
그 와중에 집안의 어떤 물건이 망가지기도 했던 것 같고,
할머니는 우리 집 누구에게도 하다못해 아빠에게도 다정하지 않았던 것 같고,
싸우다 못한 엄마가 나를 데리고 집을 나와서는 갈 데가 없어 길건너 담벼락 뒤에서 눈치만 보다가
내가 무섭기도 하고 춥기도 해서 울면서 엄마한테 집에 가자고 하자 어쩔 수 없이 집에 돌아왔던 거 같기도 하고,
아주 어릴때 가끔 밤에 끓어오르는 열 때문에 누워 빙빙 돌아가는 천정과 벽을 정신없이 보고 있던 나를
아빠가 업고 등이 땀에 다 젖도록 병원이란 병원의 닫힌 문을 두드리며 애 좀 살려달라고 했던거 같기도 하고,
어떤 날은 삼촌과 심하게 말다툼을 한 아빠가 방문을 걸어잠그고 우는 소리를 듣기도 했던 거 같고,
친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하나도 슬프지 않다고, 속이 시원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던 거 같다.

그래서 나는 우리 집이 행복하다고, 즐거운 나의 집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살거면 가족이고 형제고 아무도 없이 그냥 각자 따로따로 사는게 더 낫겠다는 생각도 했었고,
다정다감한 할머니는 TV 속에만 있다고 생각했고,
초등학교 4학년이 되기 전까지 심각하게 내성적이고 말이 없었던,
심지어 엄마 아빠한테 혼날 때 조차도, 어떤 말에도 대꾸를 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방바닥만 쳐다보고 있다가,
제 풀에 지친 엄마 아빠가 혼자 말하고, 혼자 결론짓고, 혼자 반성하고 하는 동안도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랬던 나의 성격은 이런 가정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했었고,
사람들과의 관계맺기가 어려운 나의 성격의 심각한 결함의 이유를
가톨릭이라는 종교와 함께 보수와 가부장적이라고 생각했던 집안 분위기 탓으로 돌리기도 했다.

그동안 일련의 과정을 통해,
책을 읽기도 하고, 영화를 보기도 하고, 상담을 받기도 하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가족이 생기기도 하고, 혼자 나와살기도 하면서...
예전엔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이 이해가 되기도 하고,
예전엔 용서할 수 없었던 것들이 용서가 되기도 하고,
예전엔 말할 수 없었던 것들을 말할 수 있게 되기도 했다.

그때의 나의 모습과 우리 집의 모습과 우리 할머니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은 동구네 집을 들여다보는게
그렇게 아프지만은 않았고, 춥지만도 않았던 건,
지금은 엄마도, 아빠도 감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고,
그땐 몰랐지만, 엄마 아빠가 힘들었지만, 나와 동생을 잘 키우려 애쓰셨던 걸 알고,
이제는 고맙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안 쏘는 탱크인 줄 알았다고,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동구의 순진함 혹은 순수함은
우리 모두 가지고 있었던, 그러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어쩌면 있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추억이겠지만,
그래도, 이 책을 통해 만나는 동구는 그런 순수함과 순진함 때문에
읽는 내내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했다.

신인작가가 이런 문학상을 수상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는 건방진 생각이 들기도 했고,
다른 작품은 어떤 게 있을까 궁금하기도 했는데...
조만간 다른 책도 좀 찾아봐야겠다.

좋은 책 추천해준 언니님 감사합니다. ^^
<달의 제단>도 있으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