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보고듣고/책장.넘기는.소리

내 청춘을 함께 할 문장들 ... 청춘의 문장들 / 김연수

사용자 삽입 이미지









청춘의 문장들 : 작가의 젊은 날을 사로잡은 한 문장을 찾아서 / 김연수 / 마음산책



길 가다가 지나가던 아낙네의 밭은기침 소리에도 이덕무는 눈물을 흘렸겠다. 그 슬픔의 내력을 어디에다 묻겠는가?

아이가 생기면 제일 먼저 자전거 앞자리에 태우고 싶었다. 어렸을 때, 내 얼굴에 부딪히던 그 바람과 불빛과 거리의 냄새를 아이에게도 전해주고 싶었다. 아버지에게 받은 가장 소중한 것. 오랜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고 오랫동안 남아 있는 것.

나는 선천적으로 봄꽃에 대단히 취약한 유전자를 타고났다. 기점은 입춘부터다. 책상 앞에 붙여놓은 '立春大吉'이라는 글자는 내 마음에 첨가하는 이스트와 같다. 그때부터 마냥 봄을 기다리게 되는 마음은 우수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는데, 대개 그즈음이면 텔레비전에서는 "내일부터 비가 내리며 한 차례 꽃샘추위가 지나갈 예정입니다"라는 예보가 나오게 마련이고 해마다 어김없이 나는 그 멘트에 귀대 전날 밤, 옛 애인에게 바람맞은 휴가장병의 꼴이 되고 만다. 봄이라는 것에 입술이라도 있다면 전화를 걸어 왜 안 오느냐고 따져 묻기라도 할 텐데 그럴 리 만무. 결국 우수를 지나 경칩에 이르는 동안 내 마음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시들해진다. 내가 삶이라는 건 직선의 단순한 길이 아니라 곡선의 복잡한 길을 걷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그때다. 그게 사랑이든 복권 당첨이든, 심지어는 12시 가까울 무렵 버스를 기다리는 일이든 기다리는 그 즉시 내 손에 들어오는 것은 하나도 없다. ... 하나 둘 꽃소식이 들려오는 것은 바로 마음이 푹 꺼져들어간 그날부터다. ... 그나마 삶이 마음에 드는 것은, 첫째 모든 것은 어쨌든 지나간다는 것, 둘째 한 번 지나가면 다시 돌이킬 수 없다는 것.

그즈음 창 밖을 내다보면 뭔가 지나가는 게 언뜻언뜻 눈에 보였다. 바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이었다. ... 당대에 최북은 위대한 화가로 죽은 게 아니라 실패한 화가로 죽은 셈이다. ... 그렇지만 그 오기는 과연 무엇인가? 화가가 자신의 눈을 찌르다니, 왜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 파멸 속으로 뛰어드는 것일까?

큰 얘기에만 관심을 두던 20대가 지나고 나니 삶의 한쪽 귀퉁이에 남은 주름이나 흔적이 보이기 시작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주름이나 흔적처럼 살아가다가 사라진다. 머리로는 그걸 이해하지만, 마음으로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니 책을 읽다가 문득문득 목이 메는 구차한 짓을 되풀이하는 셈이다. ... 구름의 모양은 바람에 따라, 바다의 빛은 햇살의 각도에 따라 순간순간 바뀌어갔다. 사이에 있는 것들, 쉽게 바뀌는 것들, 덧없이 사라지는 것들이 여전히 내 마음을 잡아끈다. 내게도 꿈이라는 게 몇 개 있다. 그 중 하나는 마음을 잡아끄는 그 절실함을 문장으로 옮기는 일.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때 바라본 밤하늘을, 그때 느꼈던 따뜻한 고독을 잊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는 왜 살아가는가? 왜 누군가를 사랑하는가? 그건 우리가 살면서, 또 사랑하면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일들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 때로 너무나 행복하므로, 그 일들을 잊을 수 없으므로 우리는 살아가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나는 때로 너무나 행복하므로 문학을 한다. 그 정도면 인간은 충분히 살아가고 사랑하고 글을 쓸 수 있다. ... 내가 누구인지 증명해주는 일,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 견디면서 동시에 누릴 수 있는 일, 그런 일을 하고 싶었다. 청나라 사람 장조張潮는 이런 글을 남겼다. 꽃에 나비가 없을 수 없고, 산에 샘이 없어서는 안된다. 돌에는 이끼가 끼어야 제격이고, 물에는 물풀이 없을 수 없다. 교목엔 덩굴이 없어서는 안되고, 사람은 벽이 없어서는 안된다. ... 열흘 동안의 행복. 그 정도면 충분하다. 문학을 하는 이유로도, 살아가거나 사랑하는 이유로도.

삶의 여백이자 죽음의 적막을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어 귀를 때리는 한여름 매미소리를 역설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매미소리가 천지를 울리다가 문득 멈춘 상태. 그 찰나적인 상태가 바로 견딜 수 없는 삶의 여백이자, 죽음의 적막이니까. ... 혼자서만 살아가는 세상이라면, 운명이 굳이 지금 세상을 떠나라고 해도 그다지 아쉬울 것은 없으리라. 하지만 우리 모두에겐 남아 있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남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그 일이 반복되는 한, 슬픔은 오랫동안 지속되리라. ... 시간은 그렇게 지속된다.

우리 삶이란 눈 구경하기 힘든 남쪽 지방에 내리는 폭설 같은 것. 누구도 삶의 날씨를 예보하지는 못합니다. 그건 당신과 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잠시 가까이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나면 우리는 아마 다른 유형의 인간으로 바뀔 것입니다. 서로 멀리, 우리는 살아갈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이해받을 수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을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 누구에게나, 무슨 일이거나 처음 마음이 있다고 생각한다. 갓 태어난 아이의 눈과 귀처럼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들이는 시간이 있다. DJ 인혁의 강의를 듣던 그때가 바로 내게는 처음 마음이었다. 그런 처음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흘러나오는 모든 노래가 경이롭게 들린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 어차피 결과는 둘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붙거나 떨어지거나. 생은 때로 그렇게 간단하다. ... 업무상 만나는 인간이란 참 서로에게 씁쓸한 존재다.

내가 서른 살 너머까지 살아 있을 줄 알았더라면 스무 살 그 즈음에 삶을 대하는 태도는 뭔가 달랐을 것이다. ... '10여 년 전의 일이 어제처럼 생생하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단 하루가 지난 일이라도 지나간 일은 이제 우리의 것도, 살아 있는 것도 아니다. 시간을 되돌린다고 하더라도 그 눈빛을 다시 만날 수 없다. 우리는 이미 발을 동동거리며 즐거움에 가득 차 거리를 걸어가던 그때의 그 젊은이와는 아주 다른, 어떤 사람이 됐기 때문이다. ... 항상 삶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오래 지속되는구나. 스무 살, 그 무렵에 나는 '이제 그만 바라보자 / 저렇게 멀리서 반짝이는 섬들을'이라는 내용의 시를 썼지만, 이제는 그렇게 멀리서 바라보는 빛이, 마치 새로 짠 스웨터처럼, 얼마나 따뜻한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 것 같아 가만가만 고개만 끄덕인다.

누워 있노라면 꼭 관 속에 넣어진 채 버스정류장 옆에 버려진 듯한 느낌이 드는 곳

친구는 잠시 말을 잊고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에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 내가 아는 한 김광석이 부른 노래는 그런 노래다. 그의 노래에는 청춘의 결정적 순간에만 맛볼 수 있는 설득력이 있다. ... 인생의 정거장 같은 나이. 늘 누군가를 새로 만나고 또 떠나보내는 데 익숙해져야만 하는 나이. 옛 가족은 떠났으나 새 가족은 이루지 못한 나이. 그 누구와도 가족처럼 지낼 수 있으나 다음날이면 남남처럼 헤어질 수 있는 나이. ... 그러다 누군가 김광석의 노래를 듣자고 말한다. 다들 좋다고 한다. 그리고 김광석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 내게는 슬픔이 더 필요했던 것이다. ... 청춘은 그런 것이었다. 뜻하지 않게 찾아왔다가는 그 빛도 아직 사라지지 않았는데, 느닷없이 떠나버렸다.

때로 취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는 것, 그게 바로 젊음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생이란 취하고 또 취해 자고 일어났는데도 아직 해가 지지 않는 여름날 같은 것. 꿈꾸다 깨어나면 또 여기,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는 곳.

그 무엇이든, 그 누구든 10년만 열심히 한다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알 만큼 유명한 사람이 될 수 있어요. ... 10년이라고 했다. 아직 한 4년은 더 남아 있었다. 이백처럼 온 세상 사람들이 아는 그런 시인이 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거기서 끝나지 않기만을 바랐을 뿐이다.

공부가 제일 재미있었어요. 멍청이. 그것보다 재미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것도 모르고. ... 열여덟 살의 11월에 나는 처음으로 그렇게 모든 것이 지나가고 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단순히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 사실 때문에 사랑했던 것이며, 사랑하지 못할까바 안달이 난 것이었다. 사실은 지금도 나는 뭔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이상하기만 하다. 그 모든 것들은 곧 사라질 텐데,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가장 견디기 힘든 경우는 어둠 속에서 멀리 불빛이 보일 때다. 그 불빛이 얼마나 정겨운지 당장이라도 뛰어가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꾹 참았다. 참아야만 했다. ... 어둠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으면 그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제 몸으로 어둠을 지나오지 않으면 그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어둡고 어두울 정도로 가장 깊은 어둠을 겪지 않으면 그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조금만 지나면 다 나아지겠지. 그렇겠지. ... 어쩌자고 모든 것은 조금만 지나면 다 나아지는가? 어쩌자고 고통은 때로 감미로워지는가?

봄빛이 짙어지면 이슬이 무거워지는구나. 그렇구나. 이슬이 무거워 난초 이파리 지그시 고개를 수그리는구나. 누구도 그걸 막을 사람은 없구나. 삶이란 그런 것이구나. 그래서 어른들은 돌아가시고 아이들은 자라는구나. 다시 돌아갈 수 없으니까 온 곳을 하염없이 쳐다보는 것이구나. 울어도 좋고, 서러워해도 좋지만, 다시 돌아가겠다고 말해서는 안되는 게 삶이로구나.





원영언니의
"김연수의 책은 '청춘의 문장들'이 최고야. 책을 읽으면서 줄을 치기 시작하면 책 한권에 다 줄을 쳐야할 정도..."
라는 추천사를 듣고 바로 들어와 인터파크에서 검색해보고 품절이라
집 근처 홍익문고 가서 사들고 들어왔다.

조선시대 문인들의 글과 이백의 글, 그것들과 함께 했던 그의 청춘의 시간들, 그 속에서 깨달은 삶의 철학.

요즘들어 자꾸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글이 눈에 들어온다.
의도적인 것도 아니고, 모르고 접하는 것도 많은데
진중권의 말대로 우리의 역사가 근대와 전근대가 너무 짧은 시간에 뒤섞여 있어서
현재의 이러저러한 문제들이 나타난다면,
그 해답을 찾을 곳은 조선 지식인들 뿐이라는 생각도 들고,
그들이 어떤 생각, 어떤 철학, 어떤 고민을 가지고 살아갔는지 알아보고싶다는 생각이 든다.
친철하게도 그들이 쓴 글을 해제해 놓은 책도 많이들 나오는 거 같고,
이 책처럼 그들의 글에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함께 정리한 책들도 많아지고,
점점 읽을 책들이 많아지는 게, 나쁘지 않다.

김연수의 말처럼 누군가에게 그의 가치를 알아주고, 그것을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얼마나 기쁜 일일까.
나의 가치를 알아주고, 기다려주는 사람은 책을 통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던지는 그들.
그 수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이야기를 던지고 있다는 것이 기쁘다.

그렇다면, 내 인생의 청춘은 지금 이 순간.
사라지기 전에 더 열심히 사랑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