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지침서 / 쑤퉁 작 / 김택규 역 / 아고라
처첩성군
그녀는 매우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죽자 그녀는 스스로 자신을 책임져야 했다. 그 저수조 옆에서 머리를 감을 때마다 쑹렌은 냉정하게 이후의 삶을 예상했다. ... "체면이라구요? 저 같은 사람이 무슨 체면을 따진단 말이에요?"
오래 햇빛을 못 쬐어 조금 곰팡이 내매가 나는 상자 속에는, 치워두고 입지 않은 학생 시절의 옷들이 차곡차곡 개켜져 있었다. 마치 지나간 날들이 밀봉되어 드문드문한 꿈과 실의를 발산하는 듯했다.
"집중을 못 할 것 같아서 그래요. 저라는 사람은 마음이 모래알처럼 흩어져 수습할 수가 없거든요."
"퉁소는 구멍이 일곱 개 있고 구멍마다 어떤 정조가 있습니다. 그것들을 연이으면 대단히 아름답고, 대단히 감상적이지요. 퉁소를 부는 사람에게는 이 두 가지 감정이 필요합니다. ... 있기만 하면 괜찮습니다. 감상도 하나의 정조니까요. 단, 비어서는 안됩니다."
나중에 쑹렌은 페이푸가 무심코 한 그 말을 두고두고 떠올렸다. 당신은 그녀들과 달라요. 쑹렌은 페이푸가 자신에게 최소한의 위안을 줬음을 느꼈다. 그것은 약간의 온기를 띤, 희미한 겨울 햇빛 같았다.
쑹렌에게 또 생리가 왔다. 그녀는 이번만큼 초조하고 걱정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그 자홍색 피는 쑹렌에게 일종의 무자비한 충격이었다. 그녀는 내심 알고 있었다. 자신의 임신은 천줘첸의 냉담함과 무능으로 인해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음을,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앞으로 그녀는 이 천씨 집안의 화원에서 한 줄기 부평초처럼 외로이 떠돌아야 한단 말인가?
쑹렌은 창문도 꿈에서처럼 반만 닫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집 밖에서 차갑고 신선한 공기가 들어왔지만, 쑹렌은 창문에서 예얼이 남긴 죽음의 냄새를 찾아냈다. 눈이 내렸고, 세상이 반만 남았다. 나머지 반은 보이지 않았다. 조용히 지워져버렸다. 아마도 그것이 바로 불철저한 죽음일 것이다. 쑹렌은 왜 자신이 절반만 죽고 멈춰버렸는지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나머지 반은 어디에 있을까?
이혼지침서
"혐오스러워서 그래. 혐오스러운 느낌이 하루하루 심해져서 결국 증오가 되었어. 어떨 때는 밤새 잠이 오지 않아. 불을 켜고 코까지 골며 달게 자는 당신을 보면 너무 꼴사나와 보여. 그럴 때는 진짜 권총이 있었으면 해. 진짜 권총이 있으면 아마 당신 얼굴에 겨누고 쏠 거야. ... 사물을 끊임없이 변하고 발전하지. 당신이나 나나 현실을 직시해야 해. 현실은 때로는 냉혹하고 비인간적이야. 현실이란 바로 우리가 상의해야 할 이혼의 구체적인 일들이지. 상의가 끝나면 적당한 날에 법원에 가서 이혼을 하자고."
그는 거리 저편을 향해 힘껏 백동전을 던졌다. 백동전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치 그의 마음속 고민이 그 도시 전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너, 돈 빌리러 왔지? 지금 너한테는 돈이 바로 의미야. 말해봐. 의미가 얼마나 필요하지?"
"모든 사람이 나를 혐오했어. 하다못해 베이징의 버스 차장까지. 그러니까 나도 다른 사람을 미워할 이유가 있어. 모든 사람이 다 혐오스러워."
그렇게 많던 인파가 정작 그에게 필요한 때, 사라져버린 것이다.
등불 세 개
남의 집 밥솥은 늘 비엔진의 주린 배를 꼬르륵거리게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고깃배의 빨간 불은 비엔진에게 알 수 없는 편안함을 느끼게 했다. 왠지 모르게 그 빨간 불을 보니, 적적한 기분이 싹 가셨다. 텅 빈 마을에는 사람의 흔적이 없었다. "사람이 없으니까 좋네." 비엔진은 어려서부터 커서까지 지금이 가장 자유로운 시간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비엔진은 원래 다른 사람의 눈물을 두고보지 못했다. 누가 눈물을 흘리기만 하면 코가 시큰해지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전쟁의 쓰레기는 전쟁과 마찬가지로 비엔진을 의혹에 빠뜨렸다.
"두 사람 다 죽었단 말이에요." 비엔진은 그 부상병의 눈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의 눈의 광채가 별안간 어두워졌다. 그의 눈 속에도 원래 등불 한 개가 있었다. 비엔진은 자기 입에서 거센 바람이 불어 그 등불을 꺼뜨리고, 부상병의 떨리는 오른팔까지 끊어버렸다고 생각했다. ... 그는 이제 자기 손으로 덮은 게 샤오완의 손이 아니라 그 사람의 실낱 같은 마지막 숨이었음을 깨달았다.
비엔진은 고통스러워 하며 몸을 웅크렸다. 왜 총알들이 몸속에서 펑펑 터지는지 이해가 안 갔다. 자기는 취에 마을 전투의 빗발치는 총알들을 무사히 피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 많은 총알들이 몸속에 파고든 걸까? ...
"그거 알아요? 내 살 속에 총알이 있어요. 아파서 곧 죽을 것 같단 말이에요!"
이혼지침서라는 제목때문에 이상적이었는데,
영화 '홍등'의 원작인 처첩성군으로 유명한 중국 현대 작가의 책이라고 그래서 읽기 시작.
긴 수식어가 없어서 좋았고,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특이했다.
언니가 권했던 '눈물'도 한 번 읽어봐야겠다.
영화 <홍등>도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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