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진 1, 2 / 신경숙 / 문학동네
때로 어떤 다정한 말은 땅에 묻힌 씨앗처럼 사랑을 품게 만든다. ... 그의 입에서 조선어가 부드럽게 흘러나왔을 때 그녀는 언어가 감정을 변화시키는 순간을 경험했다. 리진, 이라는 발음도 아직 서툰 콜랭으로부터 조금도 어색하지 않은 조선어 발음을 듣게 된 순간, 그녀의 담담하던 마음이 일렁였던 것이다.
서로가 보이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해 다른 일을 할 수 없던 시절을 두 사람은 공유하고 있었다.
"이름의 주인이 어떻게 사느냐에 그 이름의 느낌이 생기는 게다. 사람들이 네 이름을 부를 때면 은혜의 마음이 일어나도록 아름답게 살라."
그녀는 고개를 돌려 선실 침상 머리맡에 걸어놓은 모란도를 바라보았다. 헤어진 사람들이 남긴 흔적들은 불안으로 인해 산란해진 마음을 달래준다.
손을 잡고 있으면 두 사람 사이에 내밀한 마음이 솟아나기 마련이다.
물은 생긴 대로 퍼담을 수도 있고 따를 수도 있다. 어디에나 고일 수도 있고 어디로든 흘러갈 수도 있다. 어떻게도 그 본성을 변화시켜놓을 수 없으니 그것이 물의 힘이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살아가는 일이 덜 힘든 법이다. 좋아하는 일로 힘이 들게 된다 해도 그 힘듦이 살아가는 의미가 되는 게야. 너는 부자다. 마음속에 선교사님이 있지 않니. 아무도 좋아하는 사람이 없는 사람이 진짜 가난한 사람이거든.
그림을 곧잘 그리고 춤을 잘 추는 재능이 조선의 여자아이에게 과연 어떤 인생을 살게 할 것인지. 양반가의 규수도 아닌 서씨가 글을 읽고 서책을 가까이 했던 일은 고난이었다.
반촌의 서씨는 매번 목숨을 위협받는 순간에 놓이는 왕비의 처지를 항상 생각하라, 했다. 그리하면 왕비의 어떠한 행동도 모두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다만 블랑 주교는 조선에 부임한 첫 프랑스 외교관이나 조선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있었으면 하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콜랭이 조선에 부임해와 가장 먼저 보인 관심이 사람이 아니라 조선의 도자기며 서책이라는 것에 블랑 주교는 얼마간 실망하고 있는 참이었다.
산마루를 넘으면 또 산이어도 길이 있겠지, 여겨야 살아갈 수 있다.
사람 마음이 이리 반대일 수가 있을까. 콜랭은 리진이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 종일 불안했다고 하는데, 리진은 요즈음 콜랭이 자신을 체념하면 어쩌나 싶은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궁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보니 나아갈 길이 없었다. 그 두려움이 오늘 새벽 <레 미제라블> 속에 향낭을 끼워넣게 했다.
"조선이나 조선인들에 관계되는 것들은 무시하는 게 좋습니다. 아, 마담은 아닙니다. 마담은 훌륭한 파리 시민이니까요." ... 아는 얼굴이 하나도 없는 장소에 홀로 버려진 듯한 고독이 리진을 스치고 지나갔다.
코고르당의 저택에서 벌어진 무도회에서 복통으로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가 아기가 유산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루 리진은 석 달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벌써 반년이 지난 얘기다. 궁궐의 방 동구 소아가 준 꽃씨들을 화분에 심어보았으나 싹이 돋지 않았다. 리진은 화분을 광장으로 들고 나가 깨버렸다. 궁중에서 함께 기르던 난 또한 죽은 지 이미 오래였다.
그리운 것은 눈을 감아야만 보인다.
혼자 있는 사람의 뒷모습엔 하지 못한 말이 씌어 있다.
리진은 대답 대신 방 안에 스며든 새벽빛을 바라보며 콜랭의 무릎을 찾아 베었다. 이 남자는 모를 것이다. 지난 사흘 동안 문밖 출입을 하지 않았던 건 아파서가 아니었다. 당장 옷차림이 문제였다. 파리에서 입던 옷을 계속 입어야 할지 조선 옷으로 바꿔입어야 할지 머리 모양은 어떻게 해야할지...... 모든 것일 새로 생각해야 했다. 조선을 떠나기 전의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 리진에게는 고통이 밀려왔다.
칼을 쓰는 데는 첫째 담력이 있어야 하고, 둘째 힘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순서를 둘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것이 마음을 올바르게 갖는 것이라고도 했다. 세 가지를 갖추는 것이 칼을 날래게 사용해도 되는 자격이라고 했다. ... 강연은 고개를 돌려 깊은 숨을 내쉬며 잠든 리진을 보았다. 희망을 갖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일이 희망을 갖는 일보다 더 힘겹다.
나의 힘으로 다른 사람을 보살피는 박애가 무엇인지, 나의 자유로 나의 삶을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느끼고 깨달았습니다. ... 나, 리진을 내려놓고 모쪼록 자유로우세요. 그래야 나도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당신을 만나지 못해도 이따금 당신의 후두염이 염려되겠지요. 당신도 나를 만나지 못해도 이따금 내 머리를 빗기고 싶겠지요. 이것으로 우리는 충분하다 여깁니다.
김탁환의 <리심>을 읽고나서, 신경숙이 썼다는 이 책이 궁금했는데도,
언니한테 이 책을 빌려서 한달을 넘게 가지고 있으면서도 책이 손에 잡히질 않았는데,
역시 신경숙이라 익숙한 문체 때문인지, 책장이 술술 넘어가길래 미루던 걸 이제야 읽었다.
김탁환의 <리심>이 실존 인물에 대한 디테일한 드라마 스케일이라면,
신경숙의 <리진>은 개화기 있었을 법한 프랑스 남자와 조선 여인의 멜로 영화 스케일.
소설가 신경숙을 싫어하진 않지만, 그녀 나름의 한계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베스트 셀러 칸에는 신경숙의 <리진>이 올라와 있지만,
난, 김탁환의 <리심>을 적극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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