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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듣고/책장.넘기는.소리

나비처럼 자유롭게 ... 잠수복과 나비 / 장-도미니크 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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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복과 나비 Le Scaphandre et le papillon
장-도미니크 보비 / 양영란 역 / 동문선 현대신서 154


소생 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상황이 좀더 복잡해졌다. 죽지는 않지만, 몸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마비된 상태에서 의식은 정상적으로 유지됨으로써 마치 환자가 내부로부터 감금당한 상태, 즉 영미 계통의 의사들이 '로크드 인 신드롬(Locked-in Syndrome)'이라고 표현한 상태가 지속된다.

기억이야말로 감각의 무궁무진한 보고이다.

그날 이후 아버지와 나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 ... 나는 마비된 내 몸 속에 갇혔고, 아버지는 4층 계단 때문에 발목이 묶이셨다.

정상적으로 호흡하는 것만큼이나 가슴 뭉클하게 감동하고 사랑하고 찬미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친다. 친구로부터 받은 편지, 엽서에 그려진 발튀스의 그림, 생 시몽이 쓴 한 편의 글이 흘러가는 시간에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미적지근한 체념 속에 안주하지 않으려면, 너무 적지도 너무 많지도 않은 적당한 양의 분노와 증오심도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압력솥의 폭발을 막기 위해 안전 밸브가 달려 있는 것과 똑같은 이치이다.

나는 한편으로는 다만 몇 시간 동안이라도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웃고 우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기쁨을 맛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 겨우 열살 된 사내아이와 여덟 살난 그 아이의 여동생에게 있어서, 삶의 갖가지 고뇌를 너무 일찍 경험시키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앞선다. 비록 집안 내에서 아이들에게도 무엇이든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게 한다는 방침을 세웠어도 두렵기는 마찬가지이다. ... 내 아들 테오필 녀석은 50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거리를 두고 얌전히 앉아 있는데, 나는 그 아이의 아빠이면서도 손으로 녀석의 숱 많은 머리털 한번 쓸어 줄 수도, 고운 솜털로 뒤덮인 아이의 목덜미를 만져 볼 수도, 또 부드럽고 따뜻한 아이의 작은 몸을 으스러지도록 안아 줄 수도 없다. ... 남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는 여동생과는 반대로 내성적이고 수줍음을 많이 타는 테오필은, 언젠가 내가 교장 선생님께 특별히 부탁해서 그 아이가 학교의 종을 칠 수 있도록 허락받았을 때 몹시 부끄러워하며 나를 원망했다. 테오필이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는 아무도 예견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 아이가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살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 다시 내 병실로 돌아와 우리는 헤어지기 전 작별 인사를 나눈다. "괜찮으시겠어요, 아빠?" 테오필이 묻는다. 아빠는 목이 메이고, 햇빛에 노출되었던 손은 아리고, 바퀴 의자에 너무 오래 앉아 있었던 탓에 꼬리뼈가 짓이겨진 듯하지만, 그래도 멋진 하루를 보냈단다. 그런데 너희 꼬마들은 나의 끝없는 고독 속으로의 산보에 대해서 어떤 기억을 간직할 수 있겠니?

꽃무늬 원피스 차림의 여인들, 롤러 스케이트를 타는 청소년들, 부르릉거리는 버스의 모터 소리, 스쿠터를 탄 배달원들의 욕설, 뒤피의 그림에서 빠져 나온 듯한 오페라 광장. 건물의 정면을 막아서는 아름드리 가로수들과 푸른 하늘에 점점이 떠가는 하얀 뭉게구름. 모자라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나만 제외하고, 나는 거기에 없고 다른 곳에 있었다.

미트라 그랑샹은 사랑할 줄 몰라서 떠나보내야 했던 여인들일 수도 있고, 잡을 줄 몰라서 흘려보낸 기회일 수도 있으며, 멀리 날아가 버린 행복의 순간들일 수도 있다. 요즈음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 인생 전체가 이처럼 작은 실패의 연속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답을 뻔히 예상했으면서도 상을 탈 수 없는 경주.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우리는 판돈을 모두 환불함으로써 이 사건을 매듭지었다.

늘씬한 갈색 머리 여인의 따뜻하고 보드라운 육체 곁에서 정상인으로서의 마지막 잠을 자고 눈을 떳으면서도, 그것이 행복인지도 모르는 채 오히려 툴툴거리며 일어났던 그 아침을 어떻게 말로 표현한단 말인가? ... 작별 인사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입술이 서로 맞닿았나 싶을 때, 나는 벌써 왁스 냄새가 나는 계단을 뛰어 내려가고 있었다. 이전의 삶에서 마지막으로 맡은 냄새. ... 테오필은 마흔네 살 때 무슨 노래를 기억할까? ... 단 한순간도 내가 아마 죽어 가는 것 같다는 생각은 전혀 해보지 않았다.

이 낯익은 풍경을 대하며, 나는 막막한 심정이 되어 생각에 잠긴다. 열쇠로 가득 찬 이 세상에 내 잠수복을 열어 줄 열쇠는 없는 것일까? 종점 없는 지하철 노선은 없을까? 나는 자유를 되찾아 줄 만큼 막강한 화폐는 없을까? 다른 곳에서 구해 보아야겠다. 나는 그곳으로 간다.



영화 <잠수종과 나비>를 보고 책을 찾아보게 되었는데,
화면에 채 드러나지 못한 세밀한 감정이 느껴져서 좋았다.

소중한 건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깨닫는다고,
일상을 연결시키는 한 순간 한 순간이 마지막인듯.
뜨겁게! 치열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