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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듣고/책장.넘기는.소리

실제하는 나와 나인 척 하는 나 ... 그대의 차가운 손 / 한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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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차가운 손 / 한 강 / 문학과지성사


내가 알게 된 것이란, 진실이란 내가 조절할 수 있는 영역이라는 거였다. 실제로 무슨 일이 나에게 일어났고 내가 무슨 감정을 느끼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일어난 상황에 가장 잘 맞는 행동을 하고, 그러고 나서 나에게 남은 감정의 찌꺼기들은 내가 처리해야 한다. 인내한다거나, 잊어준다거나, 용서한다거나, 어쨌든 내가 소화해낼 수 있으며-소화해내야만 하며-결국 내 안에서 진실이란,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따뜻한 병아리를 가슴에 문지른 것처럼 몸이 부드러워지는 느낌. 내가 그 아이와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갖는 남모르는 기쁨이었다.

오래전부터 나는 처음 누군가를 만날 때 얼굴을 본 뒤 바로 손을 살피는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손은 제2의 얼굴이다. 손의 생김새와 동작을 관찰하면 그 사람이 얼굴 뒤로 감춘 것들의 일부를 느낄 수 있다. 마치 나름의 인격을 가진 독자적인 생명체처럼 손은 움직이고, 떨고, 감정을 발산한다.

"이 사진 보면 다들 이쁘다구 그래요. 웃는 얼굴이 귀엽다나. 웃기죠, 그때 이미 지옥이었는데. ... 웃음이란 게 얼마나 웃기는 가짠지, 사람들은 모르니까."

행복이란 말에 나는 분명히 이물감을 느꼈다.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하듯 그녀는 그 말을 발음했다.

"너한테는 타인이 그렇게 중요하구나."
"그럼요, 당연하죠. 다른 사람들 없이 내가 살 수 있어요? 순전히 나만의 생각이란 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오래전부터 이 아이는 따뜻함과 사랑을 혼동해왔다. 지금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 ... 내가 진짜 용서할 수 없는 건, 바로 나야...... 그렇게 몇백 번을 당해도 쌌던...... 나. ... 젠장, 추워. 옛날에도 그랬죠. 창피해. 모든 게 창피해, 제기랄, 추워서 견딜 수가 없어." ... 그렇지 않아. 넌 단지 어렸을 뿐이다. 비겁해서가 아니라, 너무 어렸을 뿐이다. ... "난 다 극복한 줄 알았어. ... 그런데 아냐. 착각이었어. 평생 못달아나. 죽을 때까지 난, 내 속에서 살아야 하니까...... 내 몸을 빠져나갈 수 없는 거니까. ... 이것 봐, 병신, 그 생각만 해두 추워지잖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어."

너무 맑은 물에도 고기가 안 논다는 거 몰라? 외로움을 자초하지 말라구. 흐느적흐느적 살기에도 끔찍이 외로운 세상이야.

그 정갈함과 상냥함과 품위 속에, 누구든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거부하는 듯한 냉기가, 거의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어렴풋이, 그러나 단호하게 어려 있었다.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망설이는 것 같은, 웃고 나서 잘 웃었는가를 반성하는 것같은 그 떨림을 나는 주시했다. 그 잠시의 떨림이 가신 뒤 그녀는 놀랄만큼 우아한 예의 미소를 다시 지어 보이거나, 고요하고 야무진 인상으로 입술을 지그시 다물거나 했다.

그때 나는 그녀가 지금까지 '기뻐요' '슬퍼요'라는 식의 표현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기쁜 일이군요. 반가운 일이군요. 역설적인 상황이군요. 그래요, 힘든 경우였겠군요.

" ... 내가 설계한 공간은 여자들이 더 좋아해요. 모든 걸 감출 수 있게 해주니까요."

E 자신이 말했듯이, 모든 것은 사라진다. 사라진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살아갈 수도 없는 것이다.

저것이, 저 사람이 혼자 있을 때의 표정인 것이다. 농담과 사교적인 웃음, 정치적인 언사와 비꼬기, 자기 연민의 과장된 포즈 따위가 모두 생략된, 지극히 단순한 얼굴이 거기 있었다. ... 나는 그 의자에 앉아, P가 방금 꺼내 썼던 얼굴을 벗는 것을, 지극히 단순한 얼굴로 돌아가는 것을, 그 벗어놓았던 얼굴을 잠시 후 다시 걸치는 것을 지켜보았다.

장소를 바꾸면 사람은 좀 달라진다. 특히 자신이 먹고 잠자는 집이나, 반대로 완벽하게 낯선 장소에서는 평소와 다른 모습, 다른 목소리가 나오는 법이다.

"나...... 과거는 생각 안 해요. 미래도 생각 안 해요. 상담 선생님도 그게 좋대요. 내 이빨, 내 몸이 이렇게 된 거, 내 청춘이 흙탕물처럼 떠내려가버린 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아무것도 생각 안 해요. 생각하려다가두 얼른 잊어버려요. 그냥, 순간순간 살아요. 그러니까 얼마나 편한지 몰라요."

"껍데기는 조개나 게, 거북이처럼 단단한 걸 말해요. 하지만 껍질은 내용물에 완전히 엉겨 있죠. 사과나 배, 고양이와 개, 그리고 사람처럼."

천천히 알게 됐어. 진실이니, 고백이니 하는 따위는 웃기는 거라는 걸. 그걸 들은 사람은 반드시 이용하게 돼 있어.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별수없어. 언젠가 한 번은 반드시 이용해. 아주 화가 나거나, 모욕을 주고 싶어지거나 할 때. ... 하지만, 그때만 해도 난 아직 어리석었어. 그것...... 잘라내버린 그 손가락이 내 존재의 처음이자 끝이란 생각을 했으니까. 그게 바로 내 얼굴 뒤에 감춰진 진짜 나란 생각 말이야. 사랑을 한다면, 그걸 말하지 않고 관계를 유지한다면, 그건 가짜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지. 유치하고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지.

중고품들과 벼룩시장, 재활용품 따위를 난 증오해. 그 물건들에 덕지덕지 끼어 있는 시간, 기억, 때와 먼지와 흠, 흉터, 낡아긴 흔적들......

내가 감추려고 했던 것이 무엇이었던가? 처음에는 손가락을 감추려고 했지. 그 다음엔 손가락을 감추기 위해 모든 것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감춰야 했지. 그것을 감춘다는 것을 또다시 은폐해야 했고......

삶의 껍데기 위해서, 심연의 껍데기 위에서 우리들은 곡예하듯 탈을 쓰고 살아간다. 때로 증오하고 분노하며 사랑하고 울부짖는다. 이 모든 것이 곡예이며, 우리는 다만 병들어가고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잊은 채.


나는 얼마나 나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내가 숨기는 것은 무엇인지...
왜 숨기는지...
그래서, 다른 무엇을 나인 척 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그러면, 나는 다시 나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
생각해보게 했던 책.

실제하는 나와 보여지는 나
실제하는 나와 나인 척 하는 나
실제하는 나와 진짜 나
그 차이...

오랜만에 우리나라 작가가 쓴 한국소설을 읽었다는 느낌.
(이 느낌이 먼지는 모르겠지만, 내 편견일지도 모르겠지만...
먼가 진지하고, 먼가 무거운 그런 느낌...
요 근래 몇년간 히트치고 있는 가벼운 일본소설 때문인지,
소설책을 읽어도 만화책을 읽은것같은 느낌이었는데... 그 반대의 느낌이 들었다.)
작가 '한 강'은 한승원의 딸이고, 70년생이라네... 이 책은 2002년 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