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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철학책 ... 고슴도치의 우아함 / 뮈리엘 바르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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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의 우아함 / 뮈리엘 바르베리 작 / 김관오 역 / 아르테


사람들은 별들을 쫓는다고 믿지만, 결국 어항 속의 빨간 금붕어처럼 끝을 맺는다.

진보니 문명이니 소위 '...화(化)'로 끝나는 무수한 다른 단어들에 대해 대단한 연설을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고, 인간은 인간이기 시작한 이래 그다지 많이 진보하지 않았다. 인간은 늘, 자신이 우연히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고, 또 대다수의 호의적인 신들이 자신의 운명을 돌봐준다고 믿고 있을 뿐이다.

즉 인간들은, 행위가 아닌 말이 힘의 갖는 세상, 최고의 능력은 바로 능변인 세상에 살고 있다.

반성적 의식은 가려움의 수준을 바꾸는 데 도움을 줄까? 절대 아니다. 가렵다는 것을 아는 것과 아는 것을 의식한다는 사실을 의식한다는 것은, 가렵다는 사실에 결코 어떤 변화도 주지 않는다. ... 하지만 이 작업은 인간들에게는 아주 훌륭하게 보인다. 왜냐하면 다른 어떤 동물도 이 일을 할 수 없고, 그렇게 해서 우리는 동물성에게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그 순간들, 병마의 속박에서 빠져나온 그 순간들, 내 손 안에 있는 그의 미지근한 손 그리고 우리 둘 모두를 관통했던 즐거움의 전율을 누리고 싶었다. ... 나는 그가 그 후 바로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육체는 삼 주를 더 버텼지만, 그의 정신은 이미 영화가 끝나자마자 떠나버렸다. 왜냐하면 그는 그렇게 하는 것이 낫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는 그 어두운 영화관에서 너무 애절한 미련없이 내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는 그렇게 말없이 우리가 서로에게 말한 것을 믿으면서, 하나의 스토리가 전개되는 화면을 함께 바라보면서 평안을 찾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참을 수 없는 건, 그 애가 계속 쿨한 척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끝나는 순간 진실은 찾아온다. 피에르 아르텡스가 비단으로 만들어졌듯 비올레트 그를리에는 행주로 만들어졌고, 그리고 운명 속에 감금된 각자는 핑계대지 말고 자신의 운명과 마주해야 한다. 자신이 어떤 환상을 품기를 원했었든 간에 인생의 마지막 장에는 자기 본래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두 시간 밖에 자지 못했다 해도, 아빠는 여섯 시에 일어나 아주 진한 커피를 마시면서 신문을 읽는다. 이런 식으로 아빠는 매일 자기를 쌓는다. 나는 '자기를 쌓는다'고 했는데, 그건 매일 밤마다 모든 것이 재로 변하고, 그래서 제로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듯, 이 일을 매번 새로운 건설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서의 제 삶을 산다. 즉 끊임없이 성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재건해야 한다. 그런데 이 정체성이라는 건, 절망을 가리고 거울 앞에 선 자기에게 자기가 믿고 싶은 거짓말을 하는, 아주 덧없고 엉성한 덩어리다. 아빠에게 신문과 커피는 마치 호박이 마차로 바뀌듯, 아빠를 중요한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요술지팡이다.

그렇다 모두 그렇다. 나 같은 수위 아줌마, 비좁은 수위실 속에서 비록 가시적 권력은 포기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신적인 권력을 포기하지 않는 나까지 포함해서 모두 그렇다.

인생의 변화 그 속에서 영원을 성찰하기.

이 모든 흘러가는 것, 우리가 간발의 차이로 놓친 것, 영원히 망쳐진 것... 우리가 말했어야 했던 모든 말들, 우리가 했어야 했던 몸짓들, 어느 날 갑자기 솟아올랐지만 우리가 잡을 줄 몰라서 영원히 무 속으로 사라져버린 그 최고 최상의 그 기회들... 간발의 차이의 실패...

살고 죽기. 그건 우리가 구축한 것의 결과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잘 구축하는 것이다. 그래서 난 스스로 어떤 구속을 만들었다. 난 파괴하고 분해하는 걸 그만두고, 구축할 것이다. 심지어 콜롱브조차 뭔가 긍정적인 사람으로 만들 것이다. 중요한 건, 죽을 때 우리가 무얼 하고 있느냐고, 오는 6월 16일, 나는 구축하면서 죽고 싶다.

우리는 짐승이고, 앞으로도 짐승으로 남을 것이다. 부자네 암고양이들도 문명화된 여자들을 괴롭히는 똑같은 질병에 괴로워한다는 건, 내가 고양이 학대니 혹은 순진한 가축 종족이 인간에 의해 오염되었다고 고함을 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동물들의 운명을 이어주는 깊은 연대감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걔네들이나 우리나 같은 욕구를 갖고 살고, 같은 병으로 고통 받는다.

진정 즐겨야만 할 시간이지만 권태로움과 쓴맛, 반복 속에서 보내는 마지막 이 시간들 속에서 즐거움은 없다.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육체가 소멸하고, 친구들이 죽고, 모든이가 여러분을 잊어버리고, 결국 마지막은 고독이라는 것이다. ... 나는 너무 일찍, 인생은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간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만일 사람이 다음 날을 걱정한다면, 그건 현재를 구축할 줄 모르기 때문이고, 우리가 현재를 구축할 줄 모른다면 그건 내일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그러나 내일은 항상 오늘이 되기 때문에 그러면 끝장이다. ... 그러므로 이 모든 걸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늙어가고, 그건 아름답지도 좋지도 즐겁지도 않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중요한 건 지금이라는 걸 생각해야 한다.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모든 자신의 힘을 다해, 지금 뭔가를 구축하야 한다. ... 자기만의 에베레스트를 한 발짝 한 발짝씩 기어오르고, 그래서 그 발걸음이 조금씩의 영원이 되도록 기어올라야 한다. 미래, 그건 산 자들이 진정한 계획을 가지고 현재를 구축하는 데 쓰인다.

미셸 부인, 그녀는 고슴도치의 우아함을 지니고 있다. 겉으로 보면 그녀는 가시로 뒤덮여 있어 진짜 철옹성같지만, 그러나 속은 그녀 역시 고슴도치들처럼 꾸밈없는 세련됨을 지니고 있다고 난 직감했다. 겉보기엔 무감각한 듯하지만, 고집스럽게 홀로 있고 지독하게 우아한 작은 짐승 고슴도치.

난 처음으로, 사람들을 살피고, 저 너머를 바라보는 어떤 사람을 만났다. ... 우리는 결코 우리가 확신하는 저 너머를 보지 않으며, 그리고 더 심각한 것은 우리가 만남을 단념했다는 것, 이 영원한 거울들 속에서 우리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하면서도 자기 자신만을 만나려 한다는 것이다. ... 내 애원컨대, 내 자신의 저 너머를 보고, 누군가를 만나는 기회가 오기를 운명에게 간청한다.

난생처음으로 운명이 예상되지 않는 누구, 삶의 길이 활짝 열려 있는 누구, 싱그러움과 가능성으로 가득한 누구를 만난 것이다. ... 왜 저들은 저렇고 다른 사람들은 아니지? ... 그럼 난? ... 만약 이 세계에서 우리가 아직은 되지 않았지만 그 무엇이 될 가능성이 있다면 난 그 가능성을 붙잡을 수 있을까? 내 삶을 내 부모의 정원이 아닌 다른 정원으로 가꿀 수 있을까?

끝없이 욕망한다는 것은 너무도 지치는 일이기에... 이내 우리는 찾지 않아도 되는 즐거움을 갈망하고, 결코 시작되지도 끝나지도 않을 어떤 행복한 상태, 아름다움이 더 이상 목적이나 계획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 자체가 되는 행복한 상태를 꿈꾼다. 이 상태, 그것이 바로 예술이다. ... 삶도 움직임도 없는 무언의 장면 속에서, 계획에서 벗어난 시간, 지속과 지친 탐욕에서 벗어난 완벽함이 구현된다. 욕망이 배제된 즐거움, 시간이 배제된 삶, 의지가 배제된 아름다움.

내 인생을 통틀어 나는 결코 그렇게 좋은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혼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나는 전적인 신뢰를 느꼈다.

사는 것, 먹는 것, 생식하는 것, 태어난 목적을 완성하는 것, 그리고 죽는 것,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사실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게 사물들은 존재한다.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거나 생물학적으로 하찮은 존재로서의 운명을 피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의 거만함... 살아가고 사랑하고 생산하고 그들과 닮은 이들과 전쟁을 일으키는 그들 특유의 방식의 잔인함이나 폭력성에 대한 맹목...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지나가는 것을 우리가 포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건 우리가 사물의 아름다움과 죽음을 동시에 보는 순간에 일어나는, 사물의 찰나적인 배열이다. ... 아아, 이것이 살아 있는 것이리라. 죽어가는 순간들을 추적하는 것이.

"우리는 함께 이야기할 다른 기회가 있을 거예요. 확신해요." 그는 길을 잃은 보행자의 얼굴을 하고 물러섰다.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는 자기 자식들이 고통 속에 있을 때를 늘 안다고 말했었다.

"만약 내가 그 정도까지 그 꽃이 당신을 좋게 만드는지 알았더라면... 난 사방에 그걸 심었을 거예요."


시선은 움직이는 물을 움켜잡으려는 손과 같다는 명백함이 내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래, 눈은 지각하지만 유심히 보지 않고, 믿긴 하지만 의문을 갖지 않고, 받긴 하지만 찾지는 않는다. ... 그리고 나는 내가 날 잘 보는지를 생각했다.

생은 많은 절망이 있지만, 또 다른 종류의 시간인 아름다움의 몇 순간들도 있다. 마치 음악의 한 소절이 시간 속에 일종의 괄호와 정지를, 바로 여기 속의 다른 곳, '다시는' 속의 '언제나'를 만드는 것처럼. 그래, 바로 그거다. '다시는' 속에 있는 '언제나'

걱정 마요, 르네. 나는 자살하지 않을 것이고, 나는 아무것도 불태우지 않을 거예요. 당신을 위해 나는 이제부터 다시는 속의 언제나를 추적할 것이기 때문이에요. 그건 바로 이 세상 속의 아름다움.



이야기가 가미된 철학책을 읽은 느낌.
(알랭 드 보통의 책을 일을때 느껴지는 심리학의 어느 부분과 같은...)

모짜르트, 에미넘, 일본식 미닫이문, 영화 붉은 10월, 일본 영화들, 네덜란드 정물화, 현상학 ...
많은 이야기들이 나오지만,
인간의 동물성과 관련된 부분에 확실히 공감한다.
우리는 살고, 먹고, 생식하고, 죽는, 그렇게 존재하는 개체라는 것,
정신은 육체를 넘어서지 않는다는 것,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꽤나 많은 페이지 속에서 두서없이 나오고 있고,
프랑스어 원래의 느낌을 살리기위해였겠지만, 번역도 그닥 매끄럽지 않지만,
이 작가의 다음 작품이 나온다면 한번쯤 집어들어 보게 될 것 같기는 하다.

그런데, 작가는 르네를 갑자기 왜 죽였을까?
아름다움과 죽음을 동시에 보게하기 위해서?
그 부분은 아직 당혹스럽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