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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서 한 개인으로 살아가기 ... 바리데기 /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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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데기 / 황석영 / 창비


거럼, 세상이나 한 사람이나 다 같다. 모자라구 병들구 미욱하구 욕심 많구.
내가 덧붙였다.
가엾지.
우리 바리가 용쿠나! 가엾은 걸 알문 대답을 알게 된다니까디.

아직도 세상 도처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으며 하루라도 맘 편히 먹고 살아남기 위해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국경을 넘고 있었다.
 
나는 사람이 살아간다는 건 시간을 기다리고 견디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늘 기대보다는 못 미치지만 어쨌든 살아 있는 한 시간은 흐르고 모든 것은 지나간다.

나는 입속에서 우리말로 자유......라고 중얼거려보았다. 말이란 물건을 만나야 잊지 않게 된다고 나는 생각했다. 저 소슬바람 불어오던 두만강변과 백두산 자락의 야산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꽃들의 이름이 떠올랐다. 노랑 하양 보라색의 난초, 동자꽃, 왕별꽃, 제비꽃, 은방울꽃, 자운영, 질경이, 패랭이, 노루귀, 그리고 노란색 미나리아재비와 하얀 밥풀꽃, 끝도 없이 꽃이름들이 떠올랐다. 언니들과 들판을 달려가던 내가 생각났고 옆에 누워 눈을 살포시 감고 잠든 내 아기를 돌아보았다. 나는 홀리야라는 이름과 나란히 순이라는 우리말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리고 다시 혼자 중얼거려보았다. 홀리야 순이.

자아, 이제 그 끔찍한 사건은 잊어요. 괜찮아요, 살다보면 다 잊게 돼요. 미워하지 말아요.

사람들은 누구나 고통이 있다. 그렇지만 모두 자기가 풀어야 하는 거야. 에밀리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그녀는 남편과 타일랜드 여자 사이의 아기를 데려온 것이다. 그 여자가 감옥에 갇혀 재판을 받는 동안 아기는 시누이 집에 맡겨져 있었다고 한다. 얼마 전에 연락이 와서 망설이다가 직접 방문하여 아이를 만나보고는 그날 당장 데려와버렸다고 했다.
처음 보는 순간 가슴이 막 무너지는 것 같더라.
그녀는 호주로 시집보낸 딸이 있었지만 어린아기를 데려오자마자 집안에 활기가 도는 듯하고 자신도 젋어지는 것 같다고 자랑했다. 나는 사방의 커튼을 모두 활짝 열어젖힌 거실을 둘러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님께 좋은 일이 있을 거예요. 벌써 집안 분위기가 달라졌어요.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지.
에밀리 부인이 말했다.
토니 엄마에 대한 미움이 점점 없어지는 거야. 저앨 낳았으니까. 전에는 생각만 해도 모욕스럽고 아시아 여자만 봐도 천해 보였는데.
나는 그녀의 발을 잡고 마싸지를 하면서 몸 전체가 고르게 평온해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도 에밀리 부인 몸의 그런 느낌을 전해받았는지 늘 답답하던 가슴과 뭔가 안절부절못하던 초조감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사는 건 어디나 다 마찬가지야.
우리는 참으로 오랜만에 나란히 누웠다. 불을 끄고 누워서 잠들기 전까지 그동안 이 도시에서 살아온 일들을 앞뒤없이 얘기했다. 아시아 러시아 동유럽에서 흘러들어온 인근 업소의 소녀들 얘기. 가족이 천신만고 끝에 찾아와 데려가고 나면 반년도 못되어서 되돌아오는 여자들. 사랑하는 사람도 없이 그냥 아무하고나 잠자고 돈 받고. 소개업소 조직의 사내를 애인이라고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얘기들. 세상 어느 도시에서나 벌어지는 일들.

샹 나쁜 년. 널 죽여버릴 거야.
내 가슴속에 감추고 있던 것을 샹이 건드렸을 뿐, 그것은 먼길을 거쳐오는 동안 나를 괴롭히던 모든 것들에 대한 원한이었음을 나는 나중에 알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사고나 병으로 죽든 스스로 죽든 그건 새 출발이야. 홀리야는 새로 시작한 거다. 너도 그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된다.
내가 처음으로 대꾸했다.
아무런 악한 짓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신은 왜 저에게만 고통을 주는 거예요? 믿고 의지한다고 뭐가 달라지죠?
신은 우리를 가만히 지켜보시는 게 그 본성이다. 색도 모양도 웃음도 눈물도 잠도 망각도 시작도 끝도 없지만 어느 곳에나 있다. 불행과 고통은 모두 우리가 이미 저지른 것들이 나타나는 거야. 우리에게 훌륭한 인생을 살아가도록 가르치기 위해서 우여곡절이 나타나는 거야. 그러니 이겨내야 하고 마땅히 생의 아름다움을 누리며 살아야 한다. 그게 신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거란다. 어서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려야지!
나를 그냥 내버려두세요.
내가 외치자 압둘 할아버지는 접시를 들고 나가다가 방문 앞에서 다시 말했다.
아내와 딸들이 총살당하고 잠무카슈미르를 떠나면서 나는 너와 똑같이 신을 원망했다. 어째서 이렇게 선량한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느냐고. 그런데 육신을 가진 자는 누구나 살아가면서 지상에서 이미 지옥을 겪는 거란다. 미움은 바로 자기가 지은 지옥이다. 신은 우리가 스스로 풀려나서 당신에게 가까이 다가오기를 잠자코 기다린다.
방문이 조용히 닫히고 압둘 할아버지가 가버린 뒤에 나는 기진맥진해서 훌쩍이며 침대에 누워 있었다.

애쓰지 말라. 세상에 간직한 네 몸은 네가 아니야. 네 넋에 집이지. 몸을 버리구 떠나오문 너두 우리처럼 된다. 슬픈 거나 기쁜 거나 다아 세상에 속해 있지.

말 좀 해봐, 우리가 받은 고통을 무엇 때문인지. 우리는 왜 여기 있는지.
사람들의 욕망 때문이래. 남보다 더 좋은 것 먹고 입고 쓰고 살려고 우리를 괴롭혔지. 그래서 너희 배에 함께 타고 계시는 신께서도 고통스러워하신대. 이제 저들을 용서하면 그이를 돕는 일이 되겠구나.
어째서 악한 것이 세상에서 승리하는지, 우리가 왜 여기서 적들과 함께 있는지 알아왔어요?
전쟁에서 승리한 자는 아무도 없대. 이승의 정의란 늘 반쪽이래.
우리의 죽음의 의미를 말해보라!
신의 슬픔. 당신들 절망 때문이지. 그이는 절망에 함께하지 못해.
여긴 네가 가장 미워하는 것들이 타구 있다. 우리는 언제 풀려나지?
우리 엄마가 묶여 있어. 엄마가 미움에서 풀려나면 너희두 풀릴 거야.
불쌍한 우리 엄마, 불쌍한 우리 엄마 ......
나는 그제야 죽은 홀리야 순이가 내 안에 들어와 함께 항해했다는 걸 느낀다. 내 마음속에 형체없는 희끄무레한 배가 어둠속으로 사라진다.

희망을 버리면 살아 있어도 죽은 거나 다름없지. 네가 바라는 생명수가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만,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한다. 어떤 지독한 일을 겪을지라도 타인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된다.

샹이 약을 했었는지 창문에서 거리로 뛰어내렸단다.
나는 루 아저씨의 전화를 받고 나서 희미하게 남아 있던 꿈속의 어느 장면이 되살아났다. 샹이 나에게 언제 풀어줄 거냐고 외치던 모습이 생각났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턱 아래로 굴러떨어질 때까지 나는 그저 얼굴을 쳐들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슬픔이 아니라 부끄러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참으로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후회가 밀려왔다. 자기 앞가림에 지쳐서 샹을 한 번 찾아가본 적도 없었고 그녀를 도울 생각도 못했다. 그러고는 순이의 죽음 때문에 얼마나 미워했는지.

우리는 하마터면 세상이 달라졌다고 믿어버릴 만큼 한동안 평온하게 살았다.

아가야, 미안하다.
나는 부른 배를 잡고 헐떡이며 걷다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알리와 나는 길을 매운 채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차들 사이를 이리저리 돌아서 길을 건너갔다. 내가 흐르는 눈물을 두 손으로 닦으면서 걷다가 돌아보니 알리도 울고 있었다.



역사는 발전하는 것이 하니라 변화할 뿐이라고,
그런 역사 속에서 한 명의 개인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

광고에서 베스트셀러라 그래서 사봤는데, 정말 술술 읽어내려갔다.
전설 속 바리공주과 같은 운명의 주인공과
북한에서 시작해서 유럽에까지 너무 많은 역사적 사건을 책 한권에 다 담아내느라
좀 아쉬운 부분이 없지 않지만,
주인공을 이끌어주는 사람들이 유명한 사상가나 이데올로기가 아닌,
역사의 소용돌이를 그대로 견뎌내고 있는 나약하기 이를데없는 사람들이라는 것,
소설의 마지막도 대책없는 이상주의가 아니었다는 것,
역사는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는 것으로 마무리 되고 있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 생각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역시 우리가 황석영에게 기대하는 역할을 충분히 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만족한다.

책을 읽으면서, 우리에게 '신'이란 존재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고,
영화 '밀양'을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