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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답게 살기 ... 인간 실격 / 다자이 오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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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 다자이 오사무 / 김춘미 역 /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인간은 먹지 않으면 죽는다. 그러니까 일해서 먹고살아야 한다, 라는 말만큼 저에게 난해하고 어렵고, 그리고 협박 비슷하게 울리는 말은 없었습니다. ...... 제가 가진 행복이라는 개념과 이 세상 사람들의 행복이라는 개념이 전혀 다를지도 모른다는 불안. ...... 저는 과연 행복한 걸까요? ...... 하지만 저 자신은 언제나 지옥 가운데서 사는 느낌이었고, 오히려 저더러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들 쪽이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훨씬 더 안락해 보였습니다. ...... 이웃 사람들의 괴로움의 성질과 정도라는 것이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실용적인 괴로움, 그저 밥만 먹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해결되는 괴로움.

겁쟁이는 행복마저도 두려워하는 법입니다. 솜방망이에도 상처를 입는 것입니다. 행복에 상처를 입는 일도 있는 겁니다. 저는 상처 입기 전에 얼른 이대로 헤어지고 싶어 안달하며 예의 익살로 연막을 쳤습니다.

아무하고도 교제가 없다. 아무 데도 찾아갈 곳이 없다.

'그건 세상이 용납하지 않아'
'세상이 아니야. 네가 용서하지 않는 거겠지'
'그런 짓을 하면 세상이 그냥 두지 않아'
'세상이 아니야. 자네겠지'
'이제 곧 세상에서 매장당할 거야'
'세상이 아니라 자네가 나를 매장하는 거겠지'
...... 세상이라는 것이 개인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저는 예전보다는 다소 제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술을 끊고 슬슬 제 고정직이 되기 시작한 만화 그리기에 정성을 쏟고, 저녁 식사 후에는 둘이서 영화도 보러 가고 돌아오는 길에는 다방 같은 데 들르기도 하고 또 화분을 사기도 했습니다. 아니, 그보다도 저를 마음속으로부터 믿어주는 이 어린 신부가 하는 말을 듣고 그 행동을 바라보는 것이 즐거워서, 나도 어쩌면 차차 인간다운 것이 되어서 비참하게 죽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달콤한 생각이 희미하게 가슴속을 훈훈하게 덥혀주기 시작하던 참에 호리키가 다시 제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때 저를 엄습한 감정은 노여움도 아니고 혐오도 아니고 슬픔도 아닌 엄청난 공포였습니다. ...... 저의 새치는 그날 밤부터 나기 시작하였으며 점점 더 모든 일에 자신감을 잃게 되었고, 점점 더 인간을 한없이 의심하게 되었고, 이 세상에서 삶에 대한 일체의 기대, 기쁨, 공명 등에서 영원히 멀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실로 그것은 제 생애에 있어서 치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저는 정면에서 정수리에 치명타를 입었고 그 뒤로 그 상처는 어떤 인간에게 접근하더라도 그때마다 쓰라린 것이었습니다. ...... 요시코가 더럽혀졌다는 사실보다도 요시코의 신뢰가 더렵혀졌다는 사실이 그 뒤에도 오래오래, 저한테는 살아갈 수 없을 만큼 큰 고뇌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저는 일어나서, 급한 대로 우선 적당한 약을, 하고 생각하며 가까운 약방으로 들어갔다가 그곳 부인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부인은 플래시 세례를 한꺼번에 받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을 쳐들고 눈을 크게 뜨더니 굳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크게 뜬 눈에는 경악의 빛도, 혐오의 빛도 없었고 거의 구원을 바라는 듯한, 그리운 듯한 빛이 나타나 있었습니다. 아아, 이 사람도 틀림없이 불행한 사람이다. 불행한 사람은 남의 불행에도 민감한 법이니까, 라고 생각했을 때 언뜻 그 부인이 목다리를 짚고 위태롭게 서 있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달려가서 부축해 주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여전히 그 부인하고 얼굴을 마주 보고 서있는 사이 눈물이 나왔습니다. 그러자 부인의 큰 눈에서도 눈물이 뚝뚝 넘쳐흘렀습니다.

지금 저에게는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
......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



전에는 어떤 작가의 책이 마음에 들면 그 작가의 책을 주르르 사서 읽고 그랬는데,
이젠 어떤 내용의 책을 읽고 나면 비슷한 주제의 책들이 눈에 띄게 되는 것 같다.
전부터 다자이 오사무의 책을 다시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해서 인터파크에서 위시리스트로 등록해뒀었는데,
눈먼 자들의 도시, 눈뜬 자들의 도시를 읽고 나니,
미뤄둔 책을 읽어봐야겠단 생각이 들어서 바로 주문해버렸다.

나는 요즘의 우후죽순처럼 번역되어 나오는 일본 소설보다,
한 세기 전의 일본 작가들의 책이 더 재미있고, 더 흥미롭고, 더 감동적이다.
이미 고전이 되어버린 작품들이기 때문일까?

다자이 오사무가 다섯번째 자살 시도로 죽기 전 마지막 완간된, 자전적 소설.

주인공의 인간에 대한 두려움, 그런 그를 한없이 믿어준 한 여인과의 사랑, 그리고 그 여인의 배신.
인간답게 사는 것, 인간으로 태어나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적당히 손해보지 않고, 적당히 욕얻어먹으면서, 소위 실속차리고 사는 것이 잘 사는 것 같다고
며칠전 누가 그랬다.
어떤 게 실속차리는 건지도 잘 모르겠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책을 다 읽고 난 지금도 잘 모르겠다.
다만, 살면서 더 생각해볼 수는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