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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소통 ... 소립자 / 미셸 우엘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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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립자 / 미셸 우엘벡 / 이세욱 역 / 열린책들 (Mr. Know 세계문학)


아이는 종종 자전거를 타고 들판에 나가기도 한다. 있는 힘껏 페달을 밟노라면, 한없는 행복감으로 가슴이 뿌듯해진다. 그럴 때 아이는 삶이 영원할 것 같은 기분을 맛본다. 어린 시절에 느끼는 그런 영원성은 오래 가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는 아직 그것을 알지 못한다. 달리는 자전거 양 옆으로 풍경이 천천히 지나간다.

동물 사회는 거의 모두가 어떤 지배 체제를 바탕으로 운영된다. 이 지배체제는 구성원들간에 힘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과 결합되어 있고, 엄격한 위계 질서를 특징으로 삼고 있다.

브뤼노는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도 엄청나게 행복했던 그 몇 초와 카롤린 예세얀이 가만히 손을 밀어냈던 그 순간을 두고두고 다시 생각하게 된다. 돌이켜 보면, 소년 브뤼노의 마음 속에는 아주 순수하고 다정한 어떤 것이 있었다. 그것은 일체의 성적인 욕구에 앞서는 단순한 접촉의 욕구였다. 그저 상냥한 사람의 몸을 만지고 싶은 욕구, 상냥한 사람의 품에 안기고 싶은 욕구였다. 다정함은 성적인 매력에 앞선다. 그래서 철저히 절망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이다.

아나벨의 경우는 사정이 사뭇 달랐다. 그녀는 밤마다 미셸을 생각하며 잠이 들었고,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면 그를 다시 만난다는 기쁨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학교에서 뭔가 재미있거나 특별한 일이 생기면, 즉시 미셸을 떠올리고 그것을 그에게 이야기해 주리라고 생각했다. 어떤 이유로 그를 만나지 못하는 날에는 불안과 슬픔을 느꼈다. 여름 방학 동안에는 부모와 함께 지롱드 지방의 별장에 가 있었기 때문에 날마다 그에게 편지를 썼다. 물론 그녀의 편지는 열정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자기 또래의 남자 형제에게 쓸 수 있을 법한 편지와 비슷했다. 그리고 그녀의 삶을 감싸고 있는 감정은 불타는 정열이라기보다는 달무리처럼 부드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 속에서는 하나의 진실이 차츰차츰 분명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비록 그녀가 스스로 솔직하게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진실한 사랑>과 마주하고 있었다. 애써 구하지도 않고 진정으로 갈망한 적도 없는데, 어느새 그것이 자기 앞에 와 있는 것이었다. 그녀에게 첫사랑이 참사랑이었다. 다른 사랑은 없을 것이고, 그런 것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1974년 7월의 어느날 밤, 아나벨은 바로 그런 정황에서 자신이 하나의 개별적 존재라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깨달았다. 인간이 하나의 동물로서 자신의 개별적인 삶을 자각하는 것은 고통을 통해서다. 하지만 사회적인 존재로서 자신의 개별적인 삶을 완전하게 자각하는 것은 <거짓말>을 매개로 할 때이다. 개별적인 삶은 사실상 이 거짓말과 혼동될 수 있다. 아나벨은 열여섯 살 때까지 부모에게 숨기는 것이 없었다. 미셸에게도 비밀로 하는 것이 없었다. 그날 밤 아나벨은 몇 시간 만에 인간의 삶이 거짓말들의 끊임없는 연속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같은 기회를 통해서, 자신이 아름답다는 것도 알았다.
개별적인 삶, 그리고 그것의 결과로 나타나는 자유의 느낌은 <민주주의>의 자연적인 토대를 이룬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개인과 개인의 관계는 보통 <계약>의 형태로 조정된다. 만일 어떤 계약이 계약 당사자들 가운데 어느 한쪽의 자연권을 침해한다거나 계약 취소에 관한 분명한 조항을 갖추고 있지 않다면, 그 계약은 이 같은 사실만으로도 무효가 된다.

인간은 때로 야만의 숲 한복판에 사랑이 햇살처럼 빛나는 작고 따뜻한 자리를 만들어 낼 줄 알았다. 서로 주체가 되고 서로 아껴 주는 작은 공간을. ...... 어느날 오전 11시경에 그는 무심한 나무들 사이를 걷다가 풀밭에 벌렁 누웠다. 갑자기 마음이 아려 왔다. 그는 자신이 그토록 괴로워하고 있음에 놀랐다.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밤이었다. 시간이 10분쯤 흘렀다. 아나벨은 초인종을 눌러 미셸을 만날 수도 있었고, 그냥 돌아갈 수도 있었다. 말하자면 그녀는 <자유>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쨌거나 그 10분은 혹독한 시련의 시간이었고, 그 시간을 겪은 뒤로 그녀는 예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될 터였다.

그가 인생에서 바라는 게 있다면 그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바라는 게 전혀 없는지도 몰랐다. 어느 쪽도 확실하지는 않았다. 미셸이 생각하기에, 인생이란 어떤 간단한 것이 될 수도 있을 듯했다. 그저 무한히 되풀이되는 작은 의식들을 조합하는 게 인생이라고 생각하면서 살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때로는 그 의식들이 조금 어리석어 보이지만, 그래도 그것에 의지하면서 큰 내기도 걸지 않고 비극을 겪는 일도 없이 살 수 있을 법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삶은 그렇게 짜여 있지 않았다. 미셸은 이따금 외출을 해서 사람들과 건물들을 살펴보곤 했다. 그가 보기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아무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니, 아무도 모르고 있다는 건 과장일 수도 있었다. 무언가에 전력을 다 바치고 있는 듯한 사람들, 어떤 대의에 따라 행동하는 듯한 사람들도 더러는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들의 삶은 그 어떤 의미 때문에 무게가 있어 보였다. ...... 미셸은 청소년기에 인간은 고통을 통해서 더욱 존엄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는 자기가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을 존엄하게 만드는 것은 고통이 아니라 텔레비전이었다.

이곳에 오는 나이든 여자들은 쇠약해지고 추해진 몸을 팔고 있는 거나 진배없어. 그녀들 스스로도 그것을 알고 있어. 그래서 또 고통을 겪지. 그런데도 그 짓을 계속해. 사랑받는 것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지. 그녀들은 죽을 때까지 그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는 그녀가 행복해 하고 있음을 느꼈다. 육체적인 사랑의 가장 놀라운 특성 중의 하나는 서로 간에 최소한의 호감만 있다면 상대에 대해 강한 친밀감을 느끼게 해준다는 것이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고통을 최소화하려고 애쓴다. 속마음을 드러내는 것도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그 편이 덜 고통스럽겠다 싶으면 사람들은 이야기를 한다. 실패한 부분을 되짚고 싶어하는 것은 아마도 무언가를 희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었다. 어떤 새로운 출발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그건 좋은 징조였다.

타인에 대해서 조금은 너그러워질 필요가 있어. 누군가 먼저 시작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거야.

나 당신이랑 살고 싶어. 불행은 이제껏 겪은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불행할 만큼 불행했어. 나는 우리가 함께 살면 끝까지 행복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훗날 설령 질병과 장애와 죽음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우리는 죽는 날까지 행복할 수 있을 거야. 당신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난 시도해 보고 싶어. 나 당신을 사랑하는가 봐.

그는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에 대해서, 그녀가 품고 있는 무량한 사랑에 대해서, 인생의 우여곡절이 망쳐 버린 그 사랑에 대해서 그는 연민을 느꼈다. 연민은 어쩌면 그의 마음을 흔들 수 있는 유일한 인간적 감정일지도 몰랐다. 그 밖의 감정을 마주하면 그는 온몸에 찬 기운이 돌 정도로 신중한 태도를 보이기가 일쑤였다. 사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 그들은 자기들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진정한 인간관계를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느낌 때문에 그들의 한 순간 한 순간은 어떤 애절한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서로를 대단히 소중하게 여겼고 서로에 대해 크나큰 연민을 느꼈다. 그러나 그런 태도가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어쩌다 뜻밖의 마법이 작용한 덕분에 그들 사이로 상쾌한 바람이 불고 찬란한 햇살이 비쳐드는 날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런 날보다는 그들 속으로, 그들이 딛고 있는 땅 위로 잿빛 그늘이 번져가고 있음을 느끼는 날이 더 많았다. 그들은 모든 것에서 종말의 낌새를 보고 있었다.

행복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다고 느낄 때 찾아오는 불행, 그것이야말로 우리 인생의 가장 큰 불행이다.

브뤼노는 다가가서 크리스티안의 시신을 보았다. 그 순간 그는 자기가 뒤로 쓰러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의 머리가 쿵 하고 바닥에 부딪혔다. 직원들이 조심조심 그를 일으켜 세웠다. '울어요! 울어야 돼요!' 나이가 많은 직원이 간곡한 목소리로 그에게 재우쳤다.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는 자기가 울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움직일 수도 없고 숨을 쉴 수도 없는 크리스티안의 시신. 말을 할 수도 없고 사랑을 할 수도 없는 크리스티안의 시신. 이제 그 몸을 위해서는 어떤 운명도 마련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온전히 그의 탓이었다. 이번엔 모든 카드를 다 뽑았고 마지막 판이라고 생각하면서 남은 것을 다 걸었는데, 이 판마저 실패로 끝나가고 있었다.

모든 게 다 이렇게 끝나도록 되어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다른 길이나 다른 출구는 없었으리라. 얽혔던 것을 풀고 이미 시작된 것을 완수하는 건 어쩔 수 없이 그래야 했던 일이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몇 년 동안, 때로는 몇십 년 동안 자주 만나다 보면, 개인적인 문제나 정말 중요한 화제를 회피하는 것이 서서히 버릇처럼 되어 간다. 그러면서도 언젠가 더 좋은 기회가 오면 그런 것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더 인간적이고 더 완전한 관계를 맺을 수 있으리라는 전망은 끝없이 뒤로 미루어지지만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것이 사라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들은 <진정한> 인간관계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는다. 그 기대는 몇 년 동안, 때로는 몇십 년 동안 유지된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어떤 결정적인 사건(대개는 죽음으라는 사건)이 일어나서 이미 때가 너무 늦었음을 일깨워 준다. 우리가 품었던 <진정한> 인간관계에 대한 기대가 실현되지 않았음을 말이다.

'미셸, 원한다면 며칠 더 머물러 있어도 돼.' '아닙니다. 곧 떠나겠습니다. 일을 해야 하거든요.' 그는 일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갑자기 몇 줄기 빛살이 하늘을 가로지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자기가 울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의 내면에는 지독한 슬픔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내 평생 그렇게까지 슬픔에 젖어 있는 사람은 본 족이 없어요. 어쩌면 슬픔이라는 말로는 모자랄지도 모르겠어요. 모든 감정이 사라지고 마음이 완전히 황폐해진 상태였다고나 할까요? 나는 늘 그가 삶을 버거워한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생기나 활기하고는 전혀 거리가 먼 사람이었지요. 내가 보기에 그는 자기 연구에 꼭 필요한 시간만 견뎌 낸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가 얼마나 애를 썼을지 우리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지요.'



영화 <오래된정원>이 개봉할 쯤,
'네이버 오늘의 책'에서 임상수 감독이 추천한 책 이라고 소개했던 책
http://book.naver.com/todaybook/todaybook_vw.nhn?mnu_cd=naver&show_dt=20070108

현대 사회에서 '진정한 사랑'을 한다거나 '진정한 인간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에 대한
종교적, 과학적, 철학적, 육체적 고찰.
요즘 읽었던 일련의 책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과 '사랑의 역사' '눈먼 자들의도시' 등이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서로 다른 시각에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물질이 이렇게 풍요로운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끝간데 없이 공허한 마음,
커뮤니케이션의 부재,
관계맺기의 실패,
그러나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는 희망.

작년 독일에서 이 소설을 영화화 했다던데,
영화 <타인의 삶>에서 여자배우 역할을 했던 마티나 게덱 이 출연했고,
작년 베를린영화제에서 남자연기자상을 받았고,
지난 5월 어느 영화제에선가 소개되어 개봉했다던데, 몰랐다.
기회가 된다면 파일로라도 찾아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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