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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눈을 뜨고 있는가 ... 눈먼 자들의 도시 / 주제 사라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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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Blindness / 주제 사라마구 Jose Saramago / 정영목 역 / 해냄


누구나 약해질 때가 있죠, 우리가 울 수 있다는 건 좋은 거예요, 때로는 눈물이 우리를 구해주기도 하거든요, 울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때도 있는 거죠.

우리가 완전히 인간답게 살 수 없다면, 적어도 완전히 동물처럼 살지는 않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합시다. ...... 검은 안대를 한 노인은 문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며 사람들에게, 여기 혹시 침대 남는 것 있소, 하고 물었을 때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이것 역시, 다른 사람들의 요구와 조건을 우호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그런 정신 상태가 없었다면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눈먼 사람들의 세상에서만 모든 것이 진실한 모습을 드러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의사가 말했다. 사람들도 그럴까요, 검은 색안경을 썼던 여자가 물었다. 사람들 역시 그럴 겁니다, 그들을 보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

두려움은 실명의 원인이 될 수 있어요, 검은 색안경을 썼던 여자가 말했다. 그거야말로 진리로군, 그것보다 더 참된 말은 있을 수 없어, 우리는 눈이 머는 순간 이미 눈이 멀어 있었소, 두려움 때문에 눈이 먼 거지, 그리고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계속 눈이 멀어 있을 것이고. 지금 말하는 사람은 누굽니까, 의사가 물었다. 눈먼 사람이오, 어떤 목소리가 대답하더니 덧붙였다. 그냥 눈먼 사람, 여기에는 그런 사람밖에 없으니까.

처음에 이 병실의 눈먼 사람들을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었을 때는 두세 마디만 나누면 낯선 사람도 불행을 같이 겪는 동반자로 바뀔 수 있었다. 그리고 서너 마디만 더 하면 서로 모든 허물을, 그 허물들 가운데 일부는 정말 심각한 것이었음에도, 용서해 줄 수가 있었다. 당장 완전한 용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참을성 있게 이삼 일만 기다리면 되었다. 그러면 이 가엾은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고통을 수도 없이 겪어야만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눈이 없어도 알 수 있는 것은 피붙이의 목소리만이 아니다. 사람들이 흔히 눈이 멀었다고 표현하는 사랑도 그 나름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그 외에도 세상에는 설명하지 않고 놔두는 것이 최선인 일들이 있다. 이런 경우에는 사람의 내적인 생각과 감정은 파고들지 않고, 그냥 일어난 사건만 이야기하는 것이 최선이다. ...... 당신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편이 오히려 내가 이해하기가 더 쉬울 거예요. 검은 색안경을 썼던 여자는 울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우리가 얼마나 불행한 사람들인지 모르겠어요, 그녀는 중얼거리더니 덧붙였다, 나도 원했어요, 나도 원했어요, 선생님 탓이 아니에요. 조용히 해요, 의사의 아내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모두 조용히 있기로 해요, 말이 도움이 안 되는 때가 있는 거예요, 나도 울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눈물로 말할 수 있다면, 이해를 구하려고 말할 필요가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다른 사람들의 배를 불려주기 위해 내 목숨을 내놓을 생각은 없어요. 그럼 당신은 누군가 당신에게 먹을 걸 주기 위해 목숨을 잃었을 때, 그걸 먹지 않고 굶을 생각은 있소.

당신이 어디를 가든, 나도 가겠어요. 그것이 그녀가 한 말이었다. 검은 안대를 한 노인이 웃음지었다. 행복한 웃음 같았다. 실제로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그에게 물어볼 때가 아니다. 다른 눈먼 남자들의 얼굴에 나타난 놀란 표정들을 관찰하는 것이 더 재미있다. 마치 그들의 머리 위로 뭐가 지나간 것 같았다. 새 한 마리가, 구름 한 점이, 머뭇거리며 나온 아침의 첫 희미한 빛이.

그녀는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눈이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무엇에든 익숙해진다는 것, 특히 사람이기를 포기했을 경우에는 그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하려면, 그녀 역시 눈이 멀어야 했다.

이 소규모 일행은 가진 것이 별로 없었는데도 가족 잔치를 벌일 수 있었다. 한 사람에게 속한 것이 곧 모두에게 속한 것이 되는 드문 잔치였다.

여기서 부모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릴 거예요. 눈도 멀었는데 혼자서. 눈먼 데는 익숙해졌어요. 외로움은 어쩌고. 받아들여야겠죠. ...... 아가씨의 부모님도 가엾게 되고, 아가씨도 가엾게 될 거야, 아가씨가 부모님을 만났을 때는 둘 다 눈도 멀고 감정도 멀었을 거야, 우리가 전에 지니고 살았던 감정, 과거에 우리가 사는 모습을 규정하던 감정은 우리가 눈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야, 눈이 없으면 감정도 다른 것이 되어버려. ...... 일반적인 감정은 볼 수 있는 사람의 감정이었고, 따라서 눈먼 사람들도 눈먼 사람들의 감정이 아니라 성한 사람들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어, 그런데 이제 눈먼 사람들의 진짜 감정들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어.

우리 가운데 누가 우리 자신을 전과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어요.

아무리 단단한 마음에도 그 나름의 슬픔이 깃들이는 법이다.

그녀는 기뻐해야 마땅한데,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 그녀의 멀어버린 두 눈에 눈물이 고인다. 처음으로 그녀는 자신이 계속 살고 싶은 이유가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러나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답이란 필요하다고 해서 꼭 나타나는 것은 아니니까. 유일한 답은 답을 기다려보는 것일 경우가 많다.

눈먼 것이 드문 일이었을 때 우리는 늘 선과 악을 알고 행동했어요, 무엇이 옳으냐 무엇이 그르냐 하는 것은 그저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서로 다른 방식일 뿐이에요, 우리가 우리 자신과 맺는 관계가 아니고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지 말아야 해요, ...... 의사만 한마디했다, 내가 다시 시력을 회복한다면, 나는 다른 사람들의 눈을 주의깊게 볼 거야, 마치 그들의 영혼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방금 그들의 영혼이라고 했소, 검은 안대를 한 노인이 물었다. 아니면 그들의 마음일 수도 있고요, 이름은 상관없습니다. ...... 검은 색안경을 썼던 여자가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우리 내부에는 이름이 없는 뭔가가 있어요, 그 뭔가가 바로 우리에요.

우리는 어떤 것들은 잊는다. 그것이 인행이다. 그리고 어떤 것들은 기억한다.

눈먼  사람들에게는 이름이 필요 없소, 내 목소리가 나요, 다른 건 중요하지 않소.

나는 거져 지나가는 사람일 뿐이오, 작가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이것들은 그가 지나가면서 남긴 흔적들이었다. 의사의 아내는 작가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 작가는 두 손으로 그 손을 잡더니 천천히 자기 입술 위로 들어올렸다. 이윽고 작가가 말했다, 자기 자신을 잃지 마시오, 자기 자신이 사라지도록 내버려두지 마시오.

우리가 이루어낼 수 있는 유일한 기적은 계속 살아가는 거예요, 여자가 말을 이었다, 매일매일 연약한 삶을 보존해 가는 거예요, 삶은 눈이 멀어 어디로 갈지 모르는 존재처럼 연약하니까, 어쩌면 진짜 그런 건지도 몰라요, 어쩌면 삶은 진짜 어디로 갈지 모르는 건지도 몰라요, 삶은 우리에게 지능을 준 뒤에 자신을 우리 손에 맡겨버렸어요. 그런데 지금 이것이 우리가 그 삶으로 이루어놓은 것이에요.

우리에게 그럴 힘이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하지 않아, 문제는 이 여자를 여기에 내버려둘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거야.

다른 사람들과 사는 것이 어려운 게 아니야,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거지.

내가 오늘 진지하다면, 내일 후회한다 해도 그게 뭐가 문제예요. 제발 그만 하시오. 아저씨는 나와 함께 살고 싶어하고, 나도 아저씨와 함께 살고 싶어요. 미쳤군. 지금부터 함께 살아요, 부부처럼. 그리고 우리 친구들과 헤어지는 날이 와도 계속 함께 살아요, ...... 내가 과거의 그 여자라면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조금 전의 그 말을 한 사람은 오늘의 이 여자예요. 그럼 내일의 여자는 또 어떤 말을 할까. 나를 시험하는 건가요.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 내가 뭔데 아가씨를 시험하겠소, 그런 일들을 결정하는 것은 삶이오. 그럼 삶은 이미 한 가지 결정을 했어요. 그들은 서로 마주보고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멀어버린 눈이 멀어버린 눈을 응시했다.

언젠가, 우리가 더 이상 도움이 안 되고 쓸모도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 사람 말대로, 그냥 이 세상을 떠나버릴 용기를 가져야 할 거야. ...... 생각을 바꾸는 데는 진짜 희망만큼 도움이 되는 게 없죠. 그는 이제 그런 희망을 가지고 있어, 그 희망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래야지.

그러나 눈물을 흘렸던 여자는 이미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따르는 것이 그의 의무였다. 언제 다시 눈물을 핥아줄 일이 생길지 모르는 것 아닌가. ...... 갑자기 개는 털을 쭈뼛 세운다. 목에서 늑대의 울음 소리를 닮은 긴 울부짖음이 터져나온다. 이 개의 문제는 인간에게 너무 가까워졌다는 것이다. 이러다가는 꼭 인간처럼 괴로움을 겪을 것이다.

사람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미리 알 수 없는 거예요, 기다려봐야 해요, 시간을 줘봐야 해요,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시간이에요. 시간은 도박판에서 우리 맞은편에 앉아 있는 상대예요, 그런데 혼자 손에 모든 카드를 쥐고 있어요, 우리는 삶에서 이길 수 있는 카드들이 어떤 것인지 추측할 수 밖에 없죠, 그게 우리 인생이에요.

왜 우리가 눈이 멀게 된 거죠. 모르겠어.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어요. 응, 알고 싶어.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몇년전부터 제목이 눈에 띄었던 책인데, 400페이지가 넘는 두께때문이었는지 매번 미뤄두곤 했었다.
얼마전 눈뜬 자들의 도시가 출간되었고,
그 기념으로 눈뜬 자들의 도시를 사면 눈먼 자들의 도시 도서판을 증정하는 이벤트가 진행되어서
눈뜬 자들의 도시와 눈먼 자들의 도시를 함께 읽게 되었다.

눈을 떠 본다는 것과 눈이 멀어 보지 못한다는 것 사이의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던 존엄성, 자존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진실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이 옳은 것인지,
지금 내가 눈을 떠서 보고 있는 것들이 다 진실인지,
과연 나는 누군가에게 진실이었는지, 그동안 나는 눈을 뜨고 살아온건지
뒤돌아보게 하는 책.

그리고 그의 문체...
'의사의 아내' '검은 색안경을 쓴 여자' '사팔뜨기 소년' '검은 안대를 한 노인' '첫번째로 눈이 먼 남자' 들처럼
'류진아' 등의 이름으로 표현되지 않는 사람들
대화에서도 따옴표나 줄바꿈이 없이 쉼표와 마침표만으로 구분되는 문장.
그리고 그의 문체를 잘 번역하는 번역가 정영목.
(알랭 드 보통의 책 대부분을 번역했던 사람이라 이름이 익었는데, 이책도 마찬가지...)

좀 더 일찍 읽어보았다면 더 좋았을 것 같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