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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 겨우 사랑하기 / 미셸 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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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사랑하기 Aimer a Peine / 미셸 깽 Michal Quint / 김예령 역 / 문학세계사


저는 이들 가족이 나름의 방식을 통해 세상과의 화해를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 그저 그런 범죄가 실재했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진실로부터 의도적으로 눈을 돌리지만 않으면 충분한 것이니까요. 그와 함께 전 저 자신도 그들의 소박한 품위에 걸맞도록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 틸 가의 자손들이 손님방에 머물렀던 사람들 하나하나가 남기고 간 우애의 공기를 호흡할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였지요. 그들은 감정의 유토피아를 꿈꿨다고 할까요.

우린 마을 꼭대기에 웅크리고 있는 오래된 교회 앞 광장에 앉아 꾸밈없는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짧지만 영원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 그러면서 서로를 알아갔지요. 처음 유치원에 간 날, 손가랄으로 상대방을 건드려보고 킁킁 냄새도 맡고 혀끝으로 뺨도 핥아 본 후 서로 손잡고 꼭 붙어 다니기에 이르는 순진한 두 꼬마처럼요. 오, 그건 순수하고 영원한 사랑이었답니다.

"그래요, 그대를 사랑할 수 있다면...... 그저 약간만 사랑할 수 있다면......"

아버지의 목숨에 관해 그처럼 터무니없는 전권을 행사했던 사람. 그런데 막상 그 사람은 모든 걸 감미로운 옛 추억을 더듬듯이 얘기하더군요.

완전히 술에 취해 뻗어버린 테오도르를 옆에 태운 채 차를 몰고 가는 제 머리 속엔 갖가지 생각이 스쳐갔습니다. 전쟁 후 타협할 수밖에 없었던 이 고급장교 역시 어쨌든 한 사람의 인간이라면......? 그리고, 그와 다를 바 없는 우리 역시 단지 시선을 회피하는 행위만으로도 그와 똑같은 야만 상태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라면......? 나 자신만하더라도, 약간의 영웅심이 모자라 그를 응징하지도 못하고, 가차없는 정의의 집행자도 되지 못한 것 아닌가. 그로인해 결국 내게 남겨진 것은 커다란 역사적 공백 또는 몰이해뿐이다. 나는 그 결정적인 순간을 상황에 맞지 않는 서툰 행동이나 하다 지나쳐 보내고 만 셈이다...... 물론 제가 자리에서 펄쩍 일어난 건 사실이었습니다. 테오도르가 만류하는 바람에 그냥 참았던 것도 사실이고요. 그러나, 어쨌든 전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니,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를 거나 다를 바 없어요. 아버지 대신 그에게 잘못했다고 사과 하고 넙죽 엎드린 거나 마찬가지예요. 몸에 밴 예의범절을 심지어 살인자들 앞에서까지 잃지 않았어요. ...... 아버지, 말씀해주세요. 그때 자리에서 일어나 뒷걸음질로 탁자에서 멀어진 저는 비겁한 놈이었나요? ...... 아버지, 아버지라면 어떻게 하셨겠어요? ...... 아버지라면 아버지의 정당한 분노를 겉으로 표출하셨을까요, 아니면 복수하는 걸 망각함으로써 그의 범죄 사실을 부인하셨을까요? 혹은 절대악에 맞서 아버지의 본심을 드러내되 그것을 고통스런 조롱으로 바꿈으로써 승리를 거두셨을까요? 아버지, 아버지라면 그에게 무엇을 보여주시겠어요. 그에게 수치심이 들도록 하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하시겠어요? 제발 말씀 좀 해보세요, 아버지, 아버지라면 어떻게 하셨겠나......

사랑의 고통도 여전히 사랑은 사랑이죠?

어느 나라 말이든 무슨 상관이겠어, 잉에. 가슴을 찌르는 건 너의 부재이지, 네가 다시는 할 수 없을 인간의 언어가 아닌걸! 잉에, 넌 너무 일찍 떠났어...... 이렇게 내 앞에 후회와 못다만 말만 잔뜩 남기고 가버리다니......

걱정 마세요, 아버지. 머지 않아 가스똥 삼촌과 아버지, 그리고 베르나르 비키의 정원엔 또다시 꽃이 필 거예요.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의 끝에 이르러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사랑하려고, 그저 조금만이라도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일 뿐이지요. 그리고, 맙소사, 그건 정말로 고통스러운 일이랍니다, 아버지. 고통스러워요......


깽은 평범한 사람들이 역사의 회오리를 어떻게 관통하는가, 뿐만 아니라 그들이 그 경험을 어떻게 후대에 대물림하는가의 문제애 관심의 초점을 두었다. 아버지는 아들이게 무엇을 물려주(어야 하)는가. ...... 역사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 ...... 변두리에 묻혀 살아가는 평범한 이들이 역사의 결정적인 계기에 발휘하는 인간적 기품에 대한 믿음, 그들의 소박한 유머와 인정에 바치는 찬사,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의 실수와 나약함의 인정.
- 옮긴이의 말




어릴적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나오던 길 삼촌에게서 아버지와 그들의 과거 이야기를 들었던 아이가 자라,
독일에 가서 한 여자를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지지만 그들의 사랑은 이루어빌 수 없었다.

여러나라 사람들을 자신들의 가정에 머물게 하면서 나름의 방식을 세상과 화해를 시도하는 틸가의 가족.
승마 클럽에서 정원사로 일하고 있는 독일인과 프랑스인 부부 아드리안과 로즐린.
2차대전 당시, 아버지의 사형집행을 언도했던 나치 친위대 장교였고,
전쟁 후에는 아름다운 성당을 짓는 유명한 건축가였던,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2차 대전 당시의 자신은 명령에 복종한 죄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그러나, 자신의 딸에게만은 솔직할 수밖에 없었던 잉에의 아버지 존넨샤인.
그리고 아버지대의 과오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하고, 용서를 구하려했던,
주인공이 결혼하고 싶었던 유일한 여자, 잉에.

전쟁은 끝났지만, 역사는 반복된다.
무한 루프가 되어 반복되는 역사에서 화해와 용서는 불가능한 것인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 어떻게 사랑해야하는지
자꾸 생각해보게 하는 소설.

작가가 무명의 추리소설 작가였다는데, 지금은 어떤 글을 쓰고 있는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