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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 대한 온전한 이해는 가능한가? ... 타인의 고통 / 수전 손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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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 Regarding the Pain of Others / 수전 손택 Susan Sontag / 이재원 역 / 이후


피사체가 우리에게 더욱 더 친숙할수록, 사진작가는 훨씬 더 신중해지는 법이다.

사진 배경이 되는 장소가 될 수 있는 한 멀리 떨어져 있고 이국적이면 이국적일수록, 우리는 죽은 자들이나 죽어가는 자들의 정면 모습을 훨씬 더 완전하게 볼 수 있다. 따라서 신식민지화된 아프리카는 부유한 나라에 살고 있는 일반 대중들의 의식 속에 주로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있는 희생자들의 모습이 담긴 일련의 잊지 못할 사진들로 존재한다. ...... 이런 사진들이 보여주는 광경에는 이중의 메시지가 있다. 이 사진들은 잔악하고 부당한 고통, 반드시 치유해야만 할 고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런 고통은 다름 아닌 바로 그런 곳에서 발생하는 일이라고 믿게 만든다.

물론, '그라운드 제로'라고 불리게 된 그 장소, 수천 명이 묻힌 공동 묘지가 되어버린 그 장소는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사진은 그 무엇이 됐든지 간에 피사체를 변형시키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게 할 만큼 어떤 이미지를 아름답게 (혹은 끔찍하거나 견딜 수 없을 만한 것으로, 그도 아니면 꽤 견뎌낼 만한 것으로) 만들 수도 있다.

그렇지만 정작 문제는 그(살가도)의 사진이 어떻게 어디에서 전시되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진 자체에 있다.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사진들의 초점, 모든 것을 그들의 무능함으로 환원하는 그 초점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의 사진들에 달려 있는 설명에 그가 찍은 무력한 사람들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점은 중요하다. 아무리 의도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피사체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인물 사진은 이와 정반대 형태의 사진을 무절제하게 탐닉하도록 만들어 왔던 유명인 숭배 풍조의 공범이 되어버린다. ...... 그리고 해당 문제를 추상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렇지만 모든 역사와 마찬가지로 모든 정치는 구체적인 것이다.

잔악 행위를 담고 있는 사진들은 그런 행위의 존재 여부를 확증해줄 뿐만 아니라 자세히 보여주기도 한다. 정확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해됐는가 하는 논쟁들을 싹 건너 뛴 채, 이런 사진들은 잊혀질 수 없는 실례를 제시해 준다. 사진의 예시 기능은 의견, 편견, 환상, 잘못된 정보 등을 그냥 놔두게 만든다.

사람들이 사진을 통해서 뭔가를 기억한다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사진만을 기억한다는 데에 있다. 이렇듯 사진만을 통해서 기억하게 되면 다른 형태의 이해와 기억이 퇴색된다.

어느 한 전쟁, 혹은 그 어떤 전쟁일지라도 도저히 멈출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면 사람들은 그 전쟁이 가져온 참사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연민은 변하기 쉬운 감정이다.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이런 감정은 시들해지는 법이다. ...... 만약 '우리'(그런데 '우리'란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고 느낀다면, 그리고 '그들'(그런데, '그들'은 또 누구인가?)이 할 수 있는 일도 전혀 없다고 느낀다면, 사람들은 금방 지루해하고 냉소적이 되며, 무감각해지는 것이다.

어떤 이미지들을 통해서 타인이 겪고 있는 고통에 상상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텔레비전 화면에서 클로즈업되어 보여지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특권을 부당하게 향유하는 사람들 사이에 일련의 연결고리가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런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을 다른 어떤 사람의 고통에 견주는 것을 참지 못하는 법이다.


한 사람이 자기 자신 아닌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건 솔직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아무리 친한 관계여도,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정확할 수 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누구나 내 손에 박힌 가시가 가장 아프고,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손에 생긴 피가 철철 흐르는 상처는 그저 다른 사람의 일일 뿐이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개개인의 인식의 문제와 함께,
또한, 타인의 고통이 이미지화한 사진에 대한 인식의 문제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 이름도, 생활도, 가족도, 생각도 알지 못하는 ... 어떤 사람들을 향해,
그들의 상처와 삶을 향해 렌즈를 들이대는 것에 대해서,
또 그렇게 들이대서 찍은 사진에 대해서,
나도 그저 연민을 느끼고 아름답다고만 생각해왔던 건 아닌지. 가벼웠던 건 아닌지.

수전 손택의 <사진에 관하여 On Photography>와 <해석에 반대한다 Against Interpretation> 읽어 보기.


다음은 한국어판에 부록으로 실린 몇 편의 글 중,
9.11 며칠 후, 2001년 9월 24일 The New Yorker에 기고한
"Let's by All Means Grieve Together, But Let's Not Be Stupid Together" 중 일부

부디 다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 역사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그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미국은 강하다" 라는 말을 우리는 끊임없이 들어왔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런 말은 전혀 위안이 되지 않는다. 미국이 강하다는 사실을 누가 의심하겠는가? 그러나 꼭 강해지는 것만이 미국이 해야할 일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