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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듣고/책장.넘기는.소리

오래된 정원 ...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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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정원 상.하 / 황석영 / 창작과비평사


오랜 독거수의 특징은 감정의 표현을 빼앗긴다는 데 있었다. 우선 타인과 감정을 나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말을 잃고, 감정을 잊고, 추억조차도 표백되어버린다.

이게 사는 거여? 속이 헛헛허고 씁쓸해서 그런다 왜?

은결이라구. 햇빛에 강물이 반짝이는 걸 은결이라구 한다지.

하지만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면 사랑하는 이들의 일상은 언제나 새로운 출발이었다. 태어남이라든가 만남이라든가 싫증이라든가 넌더리라든가 이해라든가 죽음이라든가 미움과 노여움과 그리움이나 시시함, 그런 모든 것이 긴 장마철에 한무리씩 다가오던 끝없는 구름의 행렬처럼 차례로 스쳐 지나왔다. 기록영화에서 보았듯이 꽃봉오리가 움트고 꽃잎이 나오고 피어나고 활짝 피어나고 더 활짝 피어나 젖혀 지면서 끝에서부터 시들어 움츠러들고 드디어는 차례로 말라 떨어져 가지 끝에 간신히 붙은 꽃잎 하나 흐느적이다가 슬로우 모션으로 나부껴 떨어지는 광경. 그리고 필름은 거꾸로 돌아가며 다시 환원된다. 이 모든 출발들은 매순간 새로 시작되는 것 같다. 나는 때때로 세기말의 그림들처럼 불안하다. 이별 또한 새로운 출발이 될 테니까. 어쩌면 그는 내게서 자기를 빼앗아갈지도 모른다.

눈 들이 바라보면 꽃 핀 강산은 백두에서 한라까지 하나인데 당신들은 어떤 세상을 그리다 가셨나요.

그렇지만 어느 누군들 잊을 수 있으랴. 그들의 넉넉한 따뜻함과 시대 속에서 잊혀지고야 말 익명에도 당당했던 청춘을.

사람의 얼굴은 그냥 주전자나 물컵이나 사과 같은 정물이 아니거든요. 사람의 얼굴은 표정이에요. 마음이 투영되고 있는 그릇이지요. 그림을 그리는 자는 그걸 보아야 해요. 더구나 우리는 늘 함께 있잖아요.

이제 와 생각해보면 어떤 시련이나 고통이든 끌어안고 겪는 이에게만 꼭 그만큼 삶은 자기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을 차례차례로 내놓거든요. 참으로 지당한 말씀.

사람 사는 게 뭐니. 결국은 삶의 절반은 세끼 밥먹는 데로부터 시작되었지. 정말로 손쉬운 것이었어. 처음엔 다같이 풀치마를 입고 살았을 거야. 태양이 떠서 저물고 다시 뜰 때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거나 아니면 사랑을 했겠지. 풀벌레들이 극성스럽게 울어대는 초저녁 무렵이면 그들은 눈을 맞추고 잠자리를 찾으러 갔어. 먼동이 트기 시작하면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물가로 가서 조개를 줍고 숲으로 들어가 열매를 땄어. 하루 중에서 가장 최소한의 시간만을 먹을 것을 준비하는 일로 허비했지. 그리곤 놀았어. 남녀 사이에도 극성스런 소유욕이 없을 테니까 모든 아이들은 공동체가 함께 키우는 생명들이었을 거야.

이제는 만날 수 없는 미경아, 이 문디 가시나야, 사랑은 입술에 발린 루주처럼 혓바닥 위에 얹힌 말재간이나 추상적이고 거창한 짓이 아닐거야. 글쎄 즈네들이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 간대. 웬만한 자극 가지고는 놀라지 않는 세월이니까 말들을 과격하게 해. 사랑은...... 전체의 절반은 밥 같은 몸이고, 절반의 절반은 끊임없이 들이쉬고 내쉬는 숨결 같은 일상이고, 절반 중에 그 나머지 절반은 주변의 이웃이 완성시켜준단다. 그렇게 늙어가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다들 절반도 못 가서 실패하고 그리고 노년은 쓸쓸한 각자의 고독이야. 절반의 절반까지만 가도 다행이고 거기서 못다한 건 후생에서나 다할까.

길은 언제나 돌아오기 위해서 있다. 누구도 끝까지 걸어간 이는 없다. 서 있던 자리에는 없어진 내가 있다. 나는 이미 그다. 나와 그가 이제 만난다. 달라진 것은 없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길.

지상에서 어느 때에나 사람들은 사랑을 했어요. 세상에 드러나는 모양이 시대마다 다르기는 했어도, 물살에 씻기어 닳아지고 부서지는 돌멩이처럼 일상에 시달리는 벗들을 보면서 나는 그들이 회한에 잠기지 않기를 바래요. 지금 그들의 가슴속에 남아 있는 풍요로운 인생의 깊이를 존중하라고. 그리고 더욱 성숙한 사랑으로 지난날과 미래를 껴안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어요.

당신은 그 안에서 나는 이쪽 바깥에서 한 세상을 보냈어요. 힘든 적도 많았지만 우리 이 모든 나날들과 화해해요. 잘 가요, 여보.





네이버 블로그를 통해 알게된 '은결'님을 통해 읽게 된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