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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다 ... 운명 / 임레 케르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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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Sorstalansag / 임레 케르테스 / 박종대 역 / 다른우리



사람들은 어디서나 뭔가 새로운 것을, 그것도 처음에는 좋은 뜻으로 시작한다. 강제 수용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적어도 그렇게 체험했다. 당분간은 착실한 수감자가 되는 것으로 충분했다. 나머지는 미래의 일이었다.
...... 내가 보기에는 그들 역시 똑같이 애를 썼고 똑같이 좋은 뜻을 갖고 있었다. 그들에게도 착실한 수감자가 되는 것은 중요했다. 착실한 수감자가 된다는 것은 우리 모두의 관심사로, 누구나 번거롭더라도 신경을 많이 써야 했다.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이곳에서는 삶 자체가 우리에게 그렇게 하도록 강요했다. ...... 정작 나를 괴롭히고 나의 확신을 어떤 식으로든 무너뜨린 진짜 장본인은, 결국 (내가 이성적으로 관찰했다면)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이곳에 우연히 내가 있어야 하는 이유나, 이 사실을 납득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 수용소에서의 소년의 단상...

나는 남자에게 아주 호화롭지는 않지만 전체적으로 쾌적하고, 깨끗하고, 예쁘다는 인상을 주는 기차역에 도착했을 때의 기분을 설명하려고 애썼다. 여기서부터는 매사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단계적으로 천천히 깨달아 나간다. 하나의 단계가 끝나고, 그것이 끝났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그 다음 단계가 바로 다가온다. 그런 식으로 해서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그 사이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마지막 단계에 이르기까지 아무 일도 안하고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일을 처리하고, 살아가고, 움직이고, 활동을 하고, 매번 새로운 단계마다 요구되는 새로운 과제들을 수행해 나간다. 그런데 만일 시간 속에 이러한 순서가 존재하지 않아서 우리가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알게 된다면 우리의 머리와 가슴은 도저히 그것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 부헨발트 수용소에서의 해방 후 집으로 돌아오던 전차에서 만난 어떤 기자와의 대화 중...

"앞으로 어떻게 할 계획이냐?"
나는 약간 놀라면서 아직 거기에 대해선 생각해 보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슈터이너 씨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는지, 의자에 앉은 채로 내게 몸을 기울이며 그 늙은 박쥐 같은 손을 다시 뻗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팔이 아니고 내 무릎에 내려놓았다.
"무엇보다 그 끔찍한 일들을 먼저 잊어야 한다."
나는 아까보다 더 의아해하면서 물었다.
"어째서요?"
"그래야 네가 앞으로 살아갈 수가 있거든."
플라이쉬만 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지."
그러자 이번에는 슈타이너 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런 짐을 지고는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가 없는 법이야."
......(중략)......
나는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그 끔찍한 일들을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두 노인은 내심 무척 당황해하는 것 같았다. 이어 두 사람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물었다. 그러나 내가 먼저 두 사람에게 그 어려웠던 시절에 무엇을 했느냐고 되물었다. 한 사람이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이렇게 답했다.
"그거야...... 우린 그냥 살았지."
이 말을 받아 다른 사람이 덧붙였다.
"우린 살아남기 위해 애를 썼지."
나는 그들 역시 차례차례 단계를 밟아왔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무슨 단계를 말하는 것이냐고 물었다. 일례로 나는 아우슈비츠에서 진행된 과정을 이야기해 주었다. ......(중략)...... 중간에 서 있던 나는 10~20분 정도의 시간만 기다리면 곧장 가스실로 가게 될지, 아니면 다시 살아날 수 있을지 결정이 내려지는 시점에 도달한다. 그런데 기다리는 중간에도 열은 계속해서 앞으로 움직이고 나아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전체 대열이 움직이는 속도에 따라 큰 걸음을 떼든 작은 걸음을 떼든 조금씩 움직여 나간다. ......(중략)...... 다만 그러한 일이 단순히 '오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리로 갔다'고 덧붙였다. 그런데도 마치 모든 것이 갑자기 우리한테 그냥 '왔던' 것처럼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이제 모든 것이 그냥 지나간 것처럼, 끝난 것처럼, 변할 수 없는 것처럼,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불분명한 것처럼 그렇게 흐지부지되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가 나중에 '뒤에서' 돌이켜보게 된다면 지금이 그렇게 보일 것이라는 말이었다. 물론 우리가 우리의 운명을 '미리' 알고 있는 경우에도 그렇다고 했다. ......(중략)...... 각각의 1분은 출발을 하고 흘러가다가 다음 1분이 시작하기 전에
끝을 맺는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매 분이 어떤 새로운 것을 가져다줄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 매 분이 무언가를 가져다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 매 분 동안 우연히 일어났던 것과는 다르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건 아우슈비츠나 여기 집에서 우리가 아버지와 작별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마지막 말에 슈타이너 씨는 마음에 동요가 일어난 것 같았다. 반은 화를 내면서 반은 하소연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대체 우리가 뭘 할 수 있었다는 말이냐?!"
물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략)......
"중요한 건 하나하나의 단계예요."
모든 사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에서 각자의 단계를 거친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우슈비츠에서 줄을 맞춰 서 있었을 때 뿐 아니라 집에서도 그런 단계들을 거쳤다. 나는 그 단계들을 아버지와 어머니와 안나마리아와 함께 거쳤고, 윗층에 살았던 자매 중 언니와는 아마 가장 힘들게 그 단계를 거쳤던 것 같다. 나는 이제 '유대인'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할 수 있다. 사실 그 단계들을 밟기 전까지는 유대인이라는 것이 내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유대인에 대한 그들의 선전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 다른 피란 없다. 다만...... 이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때 갑자기 그 신문기자의 표현이 떠올랐다. 다만 주어진 상황과 그 안에서 새롭게 주어지는 여건들이 있을 뿐이다. 나도 주어진 운명을 겪어냈다. 비록 그것이 나의 운명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것을 버텨냈다. 두 노인은 어째서 내가 지금 어딘가에 뿌리를 두고 그것과 연결해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이 단지 착각이었고, 사고였고, 일종의 실수였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왜 모르는지, 혹은 경우에 따라서는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왜 모르고 있는지 모두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중략)......
"결국 우리도 책임이 있다고? 우린 희생자야!"
나는 지금 책임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사건의 본질을 분명하게 파악하고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내게서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을 두 사람이 이해해 주었으면 하고 바란다고 말했다. 나더러 승리자나 패배자가 되라고 한다든지, 원인과 결과가 되라고 한다든지, 잘못과 정의가 되라고 하는 것도 안 될 말이라고 했다. 그냥 '내 탓이 아니오' 라고 주장하는 이 씁쓰레한 어리석음을 나는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점을 이해해 달라고 거의 간청하다시피 말했다. 그러나 나는 이들이 도무지 아무것도 제대로 인정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려는 것을 알아챘다. 결국 몇 마디 혼란스런 말과 움직임, 미처 끝나지 않은 몸짓, 허공에 떠 있는 말들을 남겨둔 채 모자와 더플백을 들고 나와 버렸다.
- 집에 도착해서 가족은 만나지 못하고, 예전에 이웃에 살던 노부부와의 대화 중

이제 내가 가게 될 길 위에 피할 수 없는 덫처럼 행복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아우슈비츠의
굴뚝에서조차도 고통들 사이로 잠시 쉬는 시간에 행복과 비슷한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모두 내게 악과 '끔찍한 일'에 대해서만 묻는다. 내게는 이런 체험이 가장 기억에 남는데도 말이다. 그래, 난 사람들이 내게 묻는다면 다음엔 강제 수용소의 행복에 대해서 말할 것이다. 사람들이 묻는다면, 그리고 내가 그것을 잊지 않고 있다면.
- 책의 마지막.



아우슈비츠를 다녀온 이후,
쉰들러리스트를 DVD를 사서 다시 보고,
임레 케르테스의 '운명'을 읽고,
'유대인 이미지의 역사'를 읽기 시작하고,
유대인에 대해서, 기독교에 대해서, 인종에 대해서, 역사에 대해서, 편견에 대해서, 이성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그리고 나에 대해서 혼란스러운 생각에 빠졌다.
머리가 복잡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