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탄생 : 한 아이의 유년기를 통해 보는 한국 남자의 정체성 형성 과정 / 전인권 지음 / 푸른숲
아무튼 '아버지 공간'의 질서는 '이 세상 만물에는 모두 다 그 나름의 의미와 질서가 있다'는 것과 '세상 만물의 질서는 아버지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질서였다.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 공간'은 '질서의 공간'이라고 부를 만했고, 그 공간의 주인인 아버지는 질서의 근원이었다.
우리 사회에는 대단히 엄숙한 문화와 무례할 정도로 제멋대로인 문화가 공존한다.
누군가 중요한 사람이 있기만 하면 사정은 달라진다. 어떤 감각이 살아난다. 그와 나의 관계 속에서 내가 할 일을 결정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나는 타인을 통해서 나의 행동을 결정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혼자 있으면, 그것이 아무리 편안한 상태라고 해도, 내가 누구인지를 잘 모르며 무엇을 해야할지를 결정하지 못한다.
어머니의 죽음은 어떤 것으로도 달랠 수 없는 슬픔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푹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절망 같은 것이었다.
아버지는 부부싸움의 당사자로써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부부싸움을 초월하여 제3자 또는 선생님 같은 입장에서 화해를 시도했다. 싸움 자체의 옳고 그름이나, 누가 싸움을 결정적으로 확대시켰느냐 하는 것과 같은 '전쟁 책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길을 고집했다. 자신의 의무감과 책임감을 먼저 생각할 뿐, 자신의 아들과 사귀는 방법을 모르고 있었다. 기분이 좋으면 헛기침을 하고 일이 안 풀려서 벼랑으로 떨어질 것 같은 순간에도 너털웃음을 지을 뿐, 식구들과 희노애락을 함께할 줄 몰랐다. 결국 아버지와 나는 같은 집에서 살았지만 완전히 딴 세상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 딴 세상의 주범은 '신분'이었다. 아버지에겐 아버지란 신분이 있었고 나에겐 아들이라는 신분이 주어져 있었다.
결국 나와 동생의 형제애는 먼저 한 인간에 대한 인정과 존경의 기초 위에 건설된 형제애가 아니라, 형이나 동생이란 신분관계와 자기사랑(narcissism)이란 모래 위에 건설된 허술한 집이었다. ... 어머니의 분리사랑은 형제들 사이의 사랑이 어디로 흘러가든 관계없이 세 아들 각각이 '어머니는 나를 가장 사랑한다.'고 생각하도록 만들면 그만인 사랑이 아니었을까?
사랑도 '동굴의 우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 나의 어머니도 극진한 사랑을 통해 세 아들에게 동굴의 우상을 만들어주었다. 그 우상은 내가 '도덕적으로 선하며 훌륭한 사람이라는 우상', '특별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우상', 최종적으로 '이 세상은 내가 의도한 대로 움직여져야 한다는 우상' 등이다.
동굴 속 황제는 인간대 인간의 관계를 신분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신분적 인간(a man of status)이라고 할 수 있다. ...... 경험의 유무 또는 많고 적음이 곧 정신적 소유물의 많고 적음을 판별하는 기준이 되고, 정신적 소유물의 많고 적음이 신분의 높낮이를 결정한다고 보는 동굴 속 황제의 인식 태도를 보여준다.
질서! 그것이야말로 아버지를 나타내는 추상명사였다. 그 질서의 핵심은 '아버지 -> 형 -> 나 -> 남동생'의 순서로 이어지는 남자들의 서열이었다. 어머니와 여자 형제들은 이 질서체계에서 슬쩍 옆으로 벗어나 있었다.
나에게 어머니는 이름 없는 여인이요, 독립된 인격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나의 어머니'였다. ...... 어머니가 자신만의 욕구를 가진 여성이란 사실은 더더욱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처럼 어머니와 나는 친하기만한 사이였다. 그러니 어머니가 가정을 떠나 어떤 사회적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공상이나 환상을 품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 이데올로기는, 인간은 뿌리가 있는 존재로 소나 돼지와 같을 수 없다는 '인간 중심의 이데올로기'이며, 여자보다는 남자의 역할을 과장하는 '남성 중심의 이데올로기'이며, 많은 조상님들의 역할을 삭제.축소.과장하면서 결국 나의 비중을 크게 만드는 '나 중심의 이데올로기' 등을 담고 있다.
한 아이가 다른 형태의 아버지, 여러 명의 아버지를 체험한다는 것은 그만큼 세계로 나가는 여러 개의 창문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을 보는 눈도 여러 개를 가지게 되니 그만큼 유연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에게, 우리에게 세상으로 나가는 창문은 아버지 하나뿐이었다.
'공.사 관계'는 우리 사회의 전 영역에 거미줄처럼 퍼져있다. 아니는 어른에 대해, 여자는 남자에 대해, 학생은 선생에 대해, 후배는 선배에 대해 사적인 존재로 전락한다. 우리 나라의 모든 하부기관은 상부기관에 대해 사적인 존재로 전락하고, 최종적으로 육군참모총장이나 국무총리조차 대통령에 대해 사적인 존재로 전락할 수 있다. ...... 결국 우리 모두는 전적으로 공적인 존재이면서 전적으로 사적인 존재라는 이중적 신분을 갖고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알고 보면 '남이야 전봇대로 이빨을 쑤시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이냐.'는 말도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주장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이 프라이버시를 주장하는 말이 되려면, 아버지나 학교 선생님 또는 국가에 대해 그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남이야 ......'란 말은 타인과 관계없이 나의 배타적 권리를 주장하는 말로 쓰인다. 그것은 프라이버시가 아니라, 다시 한 번 연쇄적.중층적 권위를 강화하는 '편 나누기 어법'에 가깝다. 이런 사회에서는 국가조차 침범할 수 없다는 개인의 인권이 보장될 수가 없다. 우리는 별 생각 없이 그런 세계에 적응하고 있지만, 사실은 처참한 이야기다.
서양 아이들은 인형이나 장난감처럼 보잘것없는 자신의 재신(물건)으로부터 자신의 세계를 하나하나 벽돌 쌓듯이 키워나가는 법을 배운다. 그런 만큼 부모가 자신에게 물건을 사주거나, 재산을 상속받는 절차에 대한 인식도 뚜렷하다.
한국에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맺거나 조직을 운영하는 방법이 전통적인 신분관계를 만들고 강화하는 것이라는 의미였다. 군대 뿐만 아니라 학교도 그렇고 기업도 그렇다. ......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게 좋은 것이든 문제가 있는 것이든, '바로 이런 것이 한국적인 삶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부모님도 그런 교육방식에 찬성했다. 자기 자신을 내세우는 것보다는 남들과 함께 어울려 지내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조직이 강조하는 진선미가 옳든 그르든 사람들 속에 섞여 사는 것이 중요했다. 아마 나의 부모는 내가 외톨이로 지내는 것과 범죄조직의 '넘버3'가 되는 것 중에서 굳이 선택을 하라고 한다면, 나를 위해 '넘버3'를 선택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학교란 새로운 것을 배우는 공간이라기보다 윗사람에게 복종하고 동료들과 잘 지내는 방법을 배우는 곳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상급학교로 진학하는 것이었다. 초등학교에서는 더이상 배울 것이 없다. 그러나 중학교에 가면 더 중요한 것을 배울 것이다. 이것이 당시의 교육철학이었다.
진급하는 삶 : 내게 미래는 현재의 삶을 질식시키는 미래였다.
예술과 학문에서는 다른 사람과 다르게 본다고 하더라도, 내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의 관점이 없는 예술과 학문은 죽은 것이다.
생활계획표로 상징되는 교육방식에는 문제가 많았다. 그것은 바로 '동굴 속 황제'들을 길러내는 교육방식이기 때문이다. 첫째, 나는 만성적인 죄의식에 시달려야 했다. ... '역할의 불충실'에 관한 죄의식이었다. ... 생활계획표를 통해 '모범적 인간'이 되었다기보다는 그 '모범적 인간'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인간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둘째, 그 생활계획표는 나를 비천한 아이로 만들었다. ... '논다'는 말은 쓸모없이 시간을 보낸다는 자책의 의미가 들어 있었다. ... 셋째, 나는 다른 동네 아이들, 타집단을 배척하는 패거리의 일원이 되었다. ... 타지역에 대한 적대감, 그것은 스스로 존경심을 가질 수 없었던 우리가, 그래도 스스로 사람임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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