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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듣고/책장.넘기는.소리

소설이라기 보다 시에 가까운 ... 시라노 / 에드몽 로스탕


  시라노 / 에드몽 로스탕 작 / 이상해 역 / 열린책들



르 브레    (애정 어린 어조로) 아! 달 아래 사는 사람 중에 가장 매력적인 친구죠!

시라노     ... 첫째, 그는 날아오르게 해야 할 시구를 물지게꾼처럼 여차! 하고 힘들게 짊어지는 형편없는 배우일세!

시라노     내가 가진 우아함은 정신적인 것이오. 경박한 귀족처럼 잡스런 치장을 하지 않소. 겉모습 치장은 덜해도 정성은 더 들이지. 나라면 게을러 깨끗이 씻지 않은 이마, 눈가에 아직 잠이 매달린 몽롱한 의식, 구겨진 명예, 거덜 난 양심으로 외출하진 않을 거요. 번쩍이는 것은 아무것도 달지 않았지만 난 독립심과 솔직함을 장식 삼아 당당하게 걷소. 내가 코르셋으로 꼿꼿이 세우는 것은 늘씬한 허리가 아니라 내 영혼이오. 리본이 아니라 혁혁한 무공으로 장식을 하고, 콧수염과 더불어 정신을 말아 올린 채, 난 무리와 패거리들을 관통하며 진실이 박차처럼 울려 퍼지게 하오.

시라노     날 보게, 친구. 그리고 이 흉측한 돌기가 나에게 어떤 희망을 남겨 줄 수 있을지 말해 보게. 오! 난 환상을 품지 않는다네! 제기랄, 그래. 가끔 우울한 밤이면 나 자신이 측은해지기도 하지. 그러면 꽃향기 가득한 정원으로 들어가 이 빌어먹을 가엾은 큰 코로 4월의 향기를 맡는다네. 그리고 은빛 광선 아래, 기사의 팔에 매달려 거니는 여인을 눈으로 좇으며, 나 역시 여자와 팔짱을 낀 채 달빛 속을 거닐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 나는 마음이 들떠 까맣게 잊지...... 그리고 갑자기 정원 벽에 비친 내 옆모습의 그림자를 본다네!

시라노     (자기 가슴을 치며) 여기 담겨 있는 모든 말 중 단 한마디라도! 편지를 쓰다 보면...... (다시 펜을 쥔다) 그래, 써버리자, 완벽하도록 마음속으로 수백 번도 더 고쳐 썼던 그 사랑의 편지를. 종이 옆에 내 영혼을 내려 두고 그것을 베껴 쓰기만 하면 될 거야.

시라노     ... 난 그 대신...... 노래하고, 꿈꾸고, 웃고, 지나가고, 혼자 있고, 자유를 즐기고, 똑바로 보는 눈과 떨리는 목소리를 가지고, 마음이 내킬 때 펠트 모자를 비스듬히 쓰고, 찬성 혹은 반대를 위해 싸우거나, 시를 쓸 걸세! 영광 혹은 부를 염두에 두지 않고 일하고, 몽상에 젖어 달나라 여행을 꿈꿀 걸세! ... 간단히 말해, 참나무나 떡갈나무는 못 되더라도 빌붙어 사는 덩굴이 되진 않을 걸세. 아주 높이 오르진 못해도, 혼자 힘으로 올라갈 걸세!

시라노     입맞춤, 터놓고 말해 그것이 무엇이오? 약간 더 가까이에서 한 맹세, 보다 확실한 약속, 다시 확인되는 고백, <사랑하다>라는 동사의 i에 찍는 장밋빛 점이 아니오. 그것은 입을 귀로 여기는 비밀이자, 꿀벌의 윙윙거림만 들리는 무한의 순간, 꽃의 맛을 느끼게 해주는 결합, 서로의 마음을 약간 호흡하고, 입술 끝으로 서로 영혼을 약간 맛보는 방식 아니오!

카데들은 귀 기울여 듣지 않는 시늉을 하지만, 카드와 주사위를 쥔 손들이 허공에 머물러 있다. 파이프 담배 연기 역시 입 안에 남아 있다. 기다림.

크리스티앙     눈물자국이에요.
시라노     그래...... 시인은 자기 글에 취하고 말지. 마법처럼! 이해하게나...... 이 편지...... 아주 감동적이었네. 그걸 쓰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네.
크리스티앙     눈물을 흘렸다고?
시라노     그래...... 왜냐하면...... 죽는 건 두렵지 않아. 하지만...... 그녀를 두 번 다시 못 보는 건...... 끔찍한 일이지! 왜냐하면 내가 그녀를...... (크리스티앙이 그를 쳐다본다) 우리가 그녀를...... (황급하게) 자네가 그녀를......
크리스티앙     (편지를 빼앗으며) 그 편지, 이리 내놔요!

록산     나는 읽고, 또 읽고, 실신을 하기까지 했어요. 난 당신의 것이었어요. 그 작은 종이들 한 장 한 장은 훨훨 나부끼는 당신 영혼의 꽃잎들 같았어요. 불꽃같은 당신 편지의 각 낱말에서 강렬하고, 진실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어요......

록산     난 당신을 더욱 사랑할 거예요! 당신의 아름다움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해도......

시라노     (칼을 뽑으며 혼잣말로)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다.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슬퍼하는 건 내 죽음이니까!

공작     ... 삶에서 너무나 큰 성공을 거두게 되면 후회라기보다는 막연한 불편함을 불러일으키는 이런저런 자잘한 자기 혐오증에 시달리게 된다오. 진정 악한 짓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면서도! 저 높은 곳을 향해 한 계단씩 올라가는 동안, 그 계단을 쓸고 지나가는 공작의 모피 망토는 메마른 환상과 후회의 사각거림을 끌고 다닌다오, 당신이 천천히 이 문들을 향해 올라갈 때, 당신의 상복이 낙엽들을 쓸고 지나가는 것처럼.

시라노     낙엽! 정말 아름답게 떨어지는군! 가지에서 땅까지 그 짧은 여정 동안, 그것이 마지막 아름다움이라는 걸 알기에, 낙엽은 땅 위에서 썩어 가리라는 공포에도 그 추락이 비상처럼 우아하길 원하는 거요!

시라노     그래, 내 삶은 몰래 할 말을 일러 주고는 곧 잊히는 사람의 것이었어! (록산에게) 크리스티앙이 당신 발코니 아래에서 당신에게 말을 했던 날 밤, 기억하시오? 그렇소! 그게 바로 내 삶이오. 내가 그 아래, 짙은 어둠 속에서 숨죽이고 있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영광에 입 맞추기 위해 올라갔소! 그게 정의요. 난 내 무덤의 문턱에서 서서 인정하오, 몰리에르는 천재고, 크리스티앙은 미남이었다는 것을!

시라노     난 당신이 매력적이고, 착하고, 잘생긴 크리스티앙을 덜 기리길 바라는 건 아니오. 다만, 차가운 한기가 내 척추를 파고들 때, 당신이 그 베일에 이중의 의미를 부여해 주길, 그를 기리는 상을 치르며 나도 약간은 기려 주길 바랍 뿐이오.  

* 아트로포스 : 운명의 실을 가위로 끊은 여신




중학교 때 내가 좋아했던, 나와 이름이 같았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한테서 영화 '시라노'의 이야기를 처음 들었었다.
시라노가 보내는 편지에 밀랍으로 인장을 찍는 장면이 아주 인상적이었다는 그 친구의 얘기때문에,
그 영화는 보지 못했지만...
편지의 인장을 보면 '시라노'라는 사람이 함께 연상될 정도로...

와우북페스티발 가서 출판사 부스를 돌아다니다가 이 책을 발견하고 어찌나 반갑던지...

내용은... '영원한 사랑'이라는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그런 멜로인데...
이 내용을 프랑스어 버전으로 연극이나 뮤지컬로 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글로 번역하면서 원래 프랑스어 버전에서의 운율과 관련된 내용을 최대한 친절하게 설명하고는 있지만
'노트르담 드 파리'처럼 뮤지컬로 만들어진다면 그 느낌을 그대로 전달 받을 수 있을 듯.

그런데...
록산이 크리스티앙의 아름다운 외모가 아닌 그의 영혼을 사랑한다고,
그의 아름다움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그를 사랑하겠다고 고백한 후,
만약 시라노가 진실을 고백했다면... 그랬다면... 그녀는 시라노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