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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듣고/책장.넘기는.소리

휴식 같은 ...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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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김연수 소설집) / 김연수 / 문학동네



태식의 머릿속으로는 무덤 속인 양 불도 켜지 않은 채 사택촌 세 평짜리 방에 앉아 문짝이 떨어져나간 자개농을 바라보고 있을 그 노인이 자꾸만 떠올랐다.
--- <하늘의 끝, 땅의 귀퉁이>

이사한 뒤로 우리는 어느 때든 표준어로 얘기했다. 아버지의 명령이었다. 허벌나게 먹어쌓네, 라고도 그케 마이 묵나, 라고도 말하지 않았다. 그저, 많이도 먹네, 라고 또박또박 끊어서 말했다. 가끔 저도 모르게 아까맨치로, 라든가 긍가 안 긍가, 따위의 말을 내뱉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우리 자매는 저희끼리 입을 툭 쳤다. 손바닥으로 언니 입을 치거나 언니가 내 입을 치고 나면 배시시 웃음이 나오고 그 끝에 아련한 슬픔이 맴돌았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꼭 뿌리 뽑힌 강아지풀 같았다. ... 아무리 또박또박 표준어를 사용해도 동네 사람들은 우리가 뭐라고 얘기만 꺼내면 단번에 우리가 온 곳을 알아맞혔다. ... 그리고 상처가 아물어 더이상 아프지 않은 것처럼 언제부터인가 경상도 사투리가 살갑게 들리기 시작했다. ... 살아보니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준다는 말도 거짓말인 것 같다.
--- <그 상처가 칼날의 생김새를 닮듯>

내가 자라는 만큼 이 세상 어딘가에는 허물어지는 게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게 바로 인생의 본뜻이었다.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는 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그사이에 아무리 단단한 것이라도, 제 아무리 견고한 것이거나 무거운 것이라도 모두 부서지거나 녹아내리거나 혹은 산산이 흩어진다. 그럴 때마다 내 안에서는 부식된 철판에서 녹이 떨어져나가듯이 검고 붉은 부스러기 같은 것들이 죽어서 떨어져나갔다. 밀려드는 파도에 모래톱이 쓸려나가듯이 자잘한 빛들이 마지막으로 반짝이면서 어둠 속으로 영영 사라졌다. ... 내 마음을 풍요롭게 만든 것은 어디까지나 불빛들이었다. 추석 즈음 역전 근처 평화시장에 붐비던 노점상 카바이드 등빛과 상점마다 물건을 쌓아놓은 거리에 내걸었던 60촉 백열등의 그 오렌지 불빛들, 혹은 크리스마스 가까울 무렵이면 상점 진열창마다 서로의 빛 속으로 스며들이 반짝이던 울긋불긋한 불빛들이나 역전에 모여든 빈 택시들의 차폭등과 브레이크등이 내뿜던 붉은 불빛, 또 귀성열차가 도착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운전사들이 피우던, 그만큼이나 붉었던 담배 불빛들. 그 가물거리는 것들. ... 공정하게 한가운데를 달린다고 했을 때, 예감은 좋은 일과 나쁜 일 중 나쁜 일 쪽으로 곧잘 쓰러지곤 했다. 추억이 곧잘 좋은 일 쪽으로만 내달리는 것과는 참 다르다. 많이 다르다. ... 어느 날인가 나는 문득 이제 내가 살아갈 세상에는 괴로운 일만 남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앞으로 살아갈 세상에는 늘 누군가 내가 알던 사람이 죽을 것이고 내가 알던 거리가 바뀔 것이고 내가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이 떠나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 이제 내가 살아갈 세상에 괴로운 일만 남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도 누군가에게 내가 없어진 뒤에도 오랫동안 위안이 되는 사람으로 남을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됐다. 삶에서 시간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그저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믿었던 것들이 실은 내 안에 고스란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는 깨닫게 됐다. ... 세상을 살아가는 데 그렇게 많은 불빛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저 조금만 있으면 된다. 어차피 인생이란 그런 게 아니겠는가.
--- <뉴욕제과점>

바로 그 순간부터 나는 너를 사랑하기로 결심했어. 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그 도시락 소리가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라도 되는 양. 가슴 뛰는 그 느낌 사이로 내가 첫사랑이라고 믿었던 뭔가가 찾아왔지. 모두 깊이 잠든 밤에 몰래 들어온 도둑처럼 눈치채지도 못할 만큼 빠르게 그 사랑이 내 마음 가장 깊은 곳 빈터에 자리잡았지. 레몬즙으로 쓴 글자처럼 뜨거움에 노출되기 전까지는 어떤 글씨가 씌어져 있는지 알 수 없는 그런 사랑이 내게 찾아온 거지. ...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나는 시간은 아무리 빨리 돌아와도 늦은거야. ... 아버지의 행복이란 하룻밤 짝을 찾는 반딧불이의 화려한 빛과 같은 것이었지. 다음날 날이 밝으면 그게 얼마나 끔찍한 것이었는지 비로소 알게 되는, 이제 내가 왜 그렇게 사랑에 다가서기를 두려워했는지 알 수 있을 거야. 나는 어려서부터 그 일을 모두 지켜봤거든. 혹시 사랑이 다음날이면 끔찍한 모양으로 죽어 있는 곤충 같은 것이 아닐까 걱정했거든. 그래서 나는 네게 너무나 조심스럽게 다가간 거야. 너를 사랑한다는 말이 저절로 나올 때까지 기다렸던 거야.
--- <첫사랑>

왜 어떤 인간은 그게 죽는 길인 줄 알면서도 철부지처럼 터무니없는 오기를 부려야만 하는가? ... 썩어서 새카매진 이빨하고 시퍼런 청춘의 혼삿길은 일찌감치 틀어막을수록 좋은 기다. ... 저 봐라. 리기다소나무도 있고 직박구리도 있다. 저래 더 살아가고 있는 거라. 산 것들 저래 살아가게 하는 일이 을매나 용기 있는 일인가 나는 그때 다 깨달았던 기라.
--- <리기다소나무 숲에 갔다가>

그저 어서 나이가 들었으면 좋으련만, 어서어서 머리가 새하얗게 세어버리고 살갗도 물기가 말라버려서 누구나 자신을 늙은이로만 봐줬으면 좋으련만, 그런 바람뿐이었다. ... 눈물은 마음에서 솟구쳐 눈에서 나와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흘러내리는 동안 눈물은 상처를 달랜다. 그래서 눈물은 그렇게 쉽게 마르는 법이다.
--- <노란 연등 드높이 내걸고>





한동안 복잡한 세상사와
정신없는 일상사로
마침... 한무더기 사 둔 무거운 책들이
이리저리 생각할 것들은 많이 던져주는며 또 같이 머리가 너무 복잡해져서...
잠깐... 바람쐬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한 김연수의 소설집.

이 책을 살때만해도,
이 책을 사서 책꽂이에 꽂아두었다가 읽어야겠다고 꺼내들었을때만해도
표지에 '소설집'이라고 똑똑히 써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난 한 챕터를 읽고 나서야... 장편소설이 아니구나 했다.

한참을 장편소설만 읽어서 그런가 살짝 낯설었는데...
작가의 어린시절의 기억과 추억이 숨어있는 몇 개의 습작 같은 소설을 읽고 나니...
그냥... 잠깐 머리가 바람쐰 듯... 가벼워졌다.


누군가에게 장애인들과 함께 하는 봉사생활이 휴식이듯.
나에게는 이제 몇 권의 책들이... 휴식이 된 듯.


근데, 이 책... 2003년 동인문학상 수상작이네...
동인문학상... 조선일보사 주최더만...
작가 김동인과는 별개로... 괜히 마음에 안들어지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