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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듣고/책장.넘기는.소리

백탑파, 그들의 이상 ... 방각본 살인사건 / 김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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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각본 살인사건 상,하 / 김탁환 / 민음사



내 몸을 바르게 한 후에야 과녁을 살필 수 있음일세. 과녁이 아무리 가까워도 온몸의 기운이 손끝으로 모이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맞힐 수 없을 걸세. 자네가 맟혀야 하는 것은 과녁이 아니라 쉽게 상대를 제압하려는 자네 마음인게지. 표창을 던져 상대를 누르기보다 표창을 던지지 않고 뜻한 바를 이루는 것이 더욱 옳은 일이네.

그 발에 나막신이 신겨 있느냐 가죽신이 신겨 있느냐만을 보지 말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발만 보면 둘은 영원히 대립하며 하나는 옳고 하나는 반드시 그른 형국으로 가게 되니까요. 그 사이(間)를 살펴야 전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환술(幻術)은 한낱 환술일 따름입니다. 중요한 것은 진심입니다. 사람에 대한 진심, 시와 문에 대한 진심, 세상에 대한 진심 말입니다.

무엇이든 열심히 해서 경지에 오르면 결국 하나의 도를 얻는다고 하지 않는가? ... 우리네 삶에 즉시 보탬이 되어야만 가치 있는 것은 아니라네.

일찍이 담헌 형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지. '친구를 사귈 때에는 반드시 진실해야 한다. 착함을 보면 마음속으로 기뻐하고 칭찬해야 하며, 나쁜 점을 보면 마음속으로 걱정하고 고치도록 충고해야 한다. 반드시 자기보다 나은 친구에게 나아가 인도해 주기를 청할 것이며, 단점을 지적받으면 반드시 고쳐야 한다.'

그 가벼움을 경세(經世)에 뜻이 없음으로 보거나 뜻을 버린 이의 달아남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이 문제라네. 연람선생은 단 한 번도 조선에 산적한 문제로부터 물러난 적이 없으시지. 가벼운 웃음도 모두 이 고민을 드러내는 한 방편일 뿐이야.

언젠가 연암 선생께서도 자네가 방금 던진 질문과 비슷한 질문을 받고 이렇게 말씀하셨네. '옛것을 본받으려는 자는 옛날 자취에 구애되는 병폐가 있고, 새것을 만들어 내는 자는 법도가 없는 것이 폐단'이라고 말일세. 옛것을 본받되 고쳐 쓸  줄 알고 새것을 만들어 내되 바른 도를 찾는 것이 백탑 서생들이 꿈꾸는 바이지.

너무 파고들어 세밀하게 따지려 하면 큰 흐름을 놓치고, 전체 흐름만 따지다 보면 독이 되는 이슬비를 모두 맞지. 세밀하면서도 넓게, 넓으면서도 세밀하게!

석치, 목치, 간서치라! 참으로 미친 사람들의 시절이로세. 화광이란 자네 호도 화치와 같겠고, 꽃에 미친 사내. 왜 그렇듯 모두 미쳐서 멍청이가 되는 것인가? ... 잠시나마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없이 내가 하는 일에만 몰입하는 시간을 얻기 위함이라네. 시시비비만 가리다 보면 미치고 싶어진다네. 세상이 달라지는 걸 당장을 기대하기 힘들 때, 빠져들 무엇이 필요한 게야. 돌이든 나무든 책이든 칼이든 별이든 그림이든. 꽃이든.

문장을 논할 때 화려함과 담백함은 중요하지 않사옵니다. 이치에 맞는가 맞지 아니한가를 따질 뿐이옵니다. 이치에 맞지 않는다면 화려한 문장도 군더더기가 되고, 이치에 맞으면 짧은 탄성 하나도 금처럼 빛날 것이옵니다. 글자나 시구를 다듬는 것보다 그 뜻을 다듬어야 하옵니다.

사랑한다면, 다른 건 문제가 되지 않죠. 그 많은 애정 소설들을 떠올려 보세요. 주인공들이 불행했던 것은 사랑을 믿지 못하고 세상 이목에 끌려 다녔던 탓입니다. 사랑을 믿으세요. 그럼 다른 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어려서부터 울분과 슬픔을 차곡차곡 가슴에 쌓은 자는 위험해. 반드시 그 울분과 슬픔을 다른 이에게 옮기고 싶어하니까. 금상께서는 그 구별을 단숨에 지우려고 하신다네. ... 혹 어떤 상처에서 온 것은 아닐까. 오랜 시간 숨기고 또 숨기며 남몰래 불태웠던 횃불은 아닐까. ... 부모의 복수. 이보다 더 사무친 상처가 있으랴. 연산군 역시 처음에는 성군 소리를 듣지 않았는가. 이미 잊혀졌던 상처에서 썩은 고름이 흐르자 나라 전체가 피비린내에 휩싸였다. 금상께서 그런 전철을 밟지 말란 법이 없지 않은가.

너무 길 하나만 보며 달려가진 말게. 길은 많다네. 그 많은 길의 장단점을 알려면 시간이 필요해. 일을 만들어 가는 입장에선 그런 여유를 낭비로 받아들일 수도 있어. 이 나라는 지금 오로지 단 하나의 당만 남는 쪽으로 가고 있으이. 노론도 아니고 소론도 아닌, 양반 당도 아니고 중인 당이나 천민 당도 아닌, 단 하나의 당 말일세. 나는 결코 그 당이 오래 유지되리라 보지 않네.

사람들은 눈에 확 뛸 만큼 크고 분명한 것들을 좋아하지만 정작 큰 생각들도 작은 차이에서부터 갈리게 마련이지. 그 작은 차이를 놓치면 대부분은 수천 년 동안 응당 그러해야 하는 몇몇 규범으로 줄어든다네. 지금 이 순간 내게 중요한 것을 잡아 내려는 노력, 이제 연암 선생이나 형암 형님, 초정 형님이 소품을 아끼는 이유일세.



내가 김탁환 선생님의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하게 흥미 있을 법한 인물을 흥미롭게만 꾸며내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료를 검토하고, 문자의 행간을 살피면서
그들의 모습을, 생각을, 그들이 한 말을, 그들이 하고싶었던 말을 구현해내려 애쓴 흔적이
여기저기 보이기 때문이다.
김탁환 선생님의 책을 읽다보면,
몇 백년의 시간을 거슬러 그들과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듯한
그들의 틈에 내가 구석자리 차지하고 앉아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 책은... 백탑파 시리즈의 첫번째 책

청운몽을 중심으로 하는 살인사건을 배경으로 백탑파 서생들의 목소리를 통해서
그들의 이상과 그 시대의 현실을 그리고 그 시대의 임금 정조를 보여준다.


탑골공원에 그들이 모였다는 백탑(원각사지10층석탑)에나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이번 책에서도 잊고 있었던 좋은 우리말과 고사성어가 많이 나옴.


갓밝이 : 새벽이 되어 날이 막 밝을 무렵. 여명
옥안선풍(玉顔仙風) : 옥 같은 얼굴과 신선 같은 풍채
폐월수화(閉月羞花) : 달이 구름 뒤로 모습을 감추고 꽃이 부끄러워 시들 정도의 미모
눈부처 : 눈동자에 비쳐 나타난 사람 형상
매옥(埋玉) : 재주 있는 인물의 죽음
만화여쟁(萬花如爭) : 온갖 꽃이 다투는 것 같은 아름다움
늑줄 : 아랫사람을 엄하게 다잡다가 조금 자유롭게 늦추는 일
다잡이 : 늑줄 주었던 것을 바싹 잡죄는 일
운빈화안(雲鬢花顔) : 머리가 탐스럽고 얼굴이 아름다운 여자
논틀밭틀 : 논두렁이나 밭두렁을 따라 꼬불꼬불하고 좁게 뻗은 길
살눈 : 살짝 얇게 내린 눈
강다짐 : 국이나 물 없이 그냥 먹는 밥
볼가심 : 음식을 조금 먹어 시장기를 지우는 일
소나기눈 : 갑자기 많이 내리는 폭설
각단 : 일의 갈피나 실마리
눈안개 : 눈발이 자욱하여 사방이 안개가 낀 것처럼 희부옇게 보이는 상태
간목안(看鶩雁) : 날아다니는 따오기나 기러기를 보듯 한다는 말로, 별 관심이 없음을 뜻함
의문지망(依門之望) : 어머니가 자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문에 기대어 바라봄
장중보옥(掌中寶玉) : 손 안에 든 보배로운 옥이라는 뜻으로, 가장 사랑스럽고 소중한 것을 이르는 말
오조지정(烏鳥之情) : 까마귀가 새끼 때 키워 준 어미 새의 은혜를 갚는 애정. 즉 자식이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려는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