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조선궁녀 리심 1, 2, 3 / 김탁환 / 민음사
눈과 눈이 마주치고 말과 말이 섞이다 보면, 꽃나무가 피기도 하고 맑은 시내가 흐르기도 하는 법이지요.
옥인(玉人)!
여리디여린 물방울 하나가 장강(長江)을 만들 듯. 누구에게나 아득한 슬픔을 낳는 첫 외로움의 순간이 있다.
세상 그 어떤 소리보다도 더 큰 소리는 심장 뛰는 소리다.
새벽이 오려면 아직 멀었다. 발가락이 차다. 큰아줌마는 늘 발을 긴장시키라고 했다. 신발도 꽉 끼는 것만 신고 추운 겨울에도 발을 이불 밖으로 내놓고 지내라고 했다. 머리는 쉬더라도 발은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고, 그래야 다급한 일을 만나도 당황하지 않는다고.
천 년 만 년 흘러도 결코 잊지 못할 하루가 있는 법이야. 큰 강의 시작이라고나 할까. 마음을 집중해서 살피지 않으면 그런 날이 있는지도 몰라.
처음 마음을 건넨 사람은 흉터처럼 훈장처럼 평생 기억에 남는 법이다.
살다 보면 누구든 이럴 때가 있다. 사실을 밝혀야 하는 순간을 놓치고 나면 뜻밖에도 그 일은 비밀이 되고, 나중에는 악착같이 그것을 감추기 위해 너무너무 소중한 무엇인가를 잃게 된다.
리심은 이 어색한 침묵이 두려웠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고종이 움직임을 멈추고 또한 말을 멎을 때, 아득한 거리감이 리심을 감쌌다. 세상 전체를 메울 듯한 충만감이 일순간에 '없음(無)'으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최선을 다한다고 언제나 마음을 얻는 것은 아니다. 마음을 얻기 위해 준비한 최선이 때론 최악을 낳기도 한다. 기대만큼 상처도 깊다.
상처를 입었다고 물러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더 큰 상처를 각오하며 최선에 최선을 더하는 영혼들! 빅토르 콜랭도 그랬다.
절대 고독!
솔직히 말해, 그 가을엔 맛난 음식을 먹어도 슬프고 흥겨운 음악을 들어도 슬프고 아름다운 풍광을 보아도 슬펐다.
"드디어 떠나는 것이냐? 들뜨지 마라. 더욱 끔찍한 일이 네 앞을 가로막을 게야. 여태껏 듣도 보도 못한 일들이 벌어지겠지. 그때도 기꺼이 감내하며 나아갈 자신이 있느냐고 묻는 게다."
"머무는 것보다는 낫다고 믿고 있사옵니다."
곁에 선 이가 나와 꼭 닮은 영혼임을 깨닫는 순간이 있다.
"모래에서 태어나 모래와 함께 흐르다 모래에 묻혀 이윽고 모래가 되는 사람들이라오. 끔찍하게 가난하지만 지금 이 순간을 항상 즐기지. 어젯밤에 미련을 두기보단 내일 새벽을 기대하면서 말이오."
"눈앞으로 달려드는 것에 휘둘리다간 몸도 마음도 다친다오. 그럴 땐 크게 심호흡을 하고 먼 곳을 바라보도록 하오. 거기엔 항상 어떤 사내가 리심 그대를 보고 있을 게요."
조선이 너무 느려 답답했다면 일본은 너무 빨라 불안했다. 대체 이들은 무엇을 위하여 언제까지 어디로 질주하려는 것일까.
"늘 함께 머무는 것만이 사랑은 아니죠...... 때론 이별까지도 사랑일 때가 있으니까."
중국과 조선, 일본에서 젊은 날을 보내며 얻은 것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빅토르는 '비유'라고 했다. 삶은 삶 그 자체로 보지 않고 다양한 사물에 기대어 바라보는 방법을 배웠다는 것이다.
"...... 왜 나는 루브르로 이 뗏목을 보러 오는 걸까? 그건 아마도 삶의 화려함과 처절함이 결코 둘이 아니라 하나이기 때문일 것이오."
사하라엔 고요만이 있으리라, 없음만이 있으리라 여겼다. 그것은 나의 큰 착각이었다. 사하라엔 장사도 있고 약탈도 있고 술도 있고 욕망도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속세에선 그것들이 이런저런 변명 속에서 희미하게 때론 비열하게 드러나지만 사하라에선 명명백백하다는 것 정도였다. 사하라에서는 죽음은 죽음이고 삶은 삶이며 꿈은 꿈이고 잠은 잠이었다.
"마음에 칼날이 가득하더군."
"그게 다 칼날 때문이지. 사막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죽이거나 다치게 만드는 칼날. 유럽인들로부터 왔으되 이곳 젊은이들 가슴에도 하나씩 자라기 시작한 칼날. 난 그 칼날에 아들 일곱을 잃었어."
"그렇지. 우리 부족만 해도 부모가 모두 비명에 죽고 남은 아이가 스무 명이나 되지. 그 아이들은 모두 나를 엄마라고 불러. 물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나는 정말 그 아이들 엄마고 그 아이들은 내 사랑스러운 자식들이지. 모하메드가 설령 잘못되더라도, 나는 이 아이들이게 맑은 샘물 흐르는 오아시스와 같은 역할을 해야 해. 리심!"
그녀의 눈동자에는 어느새 희망의 빛이 서렸다.
"집착을 버려. 나 하나만, 내 가족만 챙기겠다는 집착에서 벗어나야 해. 네가 낳지 않은 아이들을 거둬 훌륭하게 키우는 거야. 이 세상 모든 가난하고 못 배운 아이들을 모두 네 자식이라고 여겨.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정말 그 아이들을 위해 네 삶 자체를 바꾸도록 해. 그럼 네 가슴속 슬픔도, 그만큼 자란 칼날도 사라질 거야."
"...... 하지만 리심! 오늘 당신이 팡테옹에 가는 거라면 나도 가고 싶어요. 하지만 리심! 오늘 당신이 팡테온에 가는 건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거잖아? 이런 날엔 혼자 있는 편이 좋아요. 사람은 외로울수록 자신의 미래를 잘 예감하는 법이니까!"
"풀피리 불고 싶다고 했죠? 가르쳐 줄께요. 문든 외로워지면 이렇게 탁 트인 곳으로 나와서 풀피리를 불어요. ...... 우선 아랫입술과 윗입술에 가볍게 침을 적시고 풀잎을 이렇게 끼워요. 마찰면이 많으면 낮은 소리를 내고 마찰면이 적으면 소리가 올라가죠. ...... 잘하고 있어요. 처음부터 소리를 내는 사람은 없답니다. 한 열흘은 입술이 얼얼할 정도로 노력을 해야죠. 먼저 입술에 머금은 이 풀들이 스스로 소리를 만들어 낸다고 믿으세요. 모든 일은 믿음에서 시작되니까요."
그는 외교관 직분을 버리면서까지 나와 혼인할 뜻이 없는 것이다. 처음엔 사랑이 인종도 넘고 종교도 넘을 수 있다고 믿지만, 그런 사랑은 철부지 동화에서나 등장하는 법이다. 외교관 직분을 유지하는 범위 안에서 나와 생활을 꾸려 가는 것. 그것이 빅토르가 지닌 사랑의 무게요 한계다. 아쉽긴 해도 나는 그의 고뇌를 이해하기로 했다. 내 마음 역시 오로지 그만을 바라보며 감독하던 시절을 지나쳤으니까.
법국에서 이방 여인으로 살아가는 게 두려웠다면 한양에서 다시 조선 여인으로 살아갈 자신은 있느냐? ...... 법국에 있든 조선에 있든 너는 혼자란 걸 명심해야 한다. 외로우냐? 설마 사랑을 믿었던 건 아니겠지? 사랑 안에서 널 속이며 여인의 행복 따윌 빌었던 건 아니겠지? 외로움은 너처럼 특별한 여인에게 내린 하늘의 축복이니라. 나 역시 축복 속에서 살다가 축복 속에서 죽었느니라. 내내 많은 이들을 만나고 이야기 나누고 또 어떤 이에게는 깊은 속내까지 드러내 보였지만, 나는 철저하게 혼자였느니라! 누구도 믿지 말고 누구에게도 네 고독을 보이지 마라. 빅토르 콜랭. 그와 있을 때도, 그의 체온을 온몸으로 느낄 때도, 너는 계속 혼자임을 되새기도록 하여라.
"병이 깊으세요. 정신이 오락가락하셔서...... 제대로 말씀 나누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두 분이 적성으로 절대로 오지 못하게 하라고...... 신신당부하셨는데...... 그게 두 분을 꼭 뵙고 싶다는 말씀으로 들려서...... 아버진 늘 그렇게 정반대로 말씀하시거든요."
부끄럽지만 파리에서 배운 거친 지혜 하나를 적어 보자면, 예술과 삶은 결코 둘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 춤 속ㅇ서 가장 행복하며 삶 속에서 가장 불행합니다. 이 명명백백하게 갈린 하루하루에서는 예술도, 삶도 온전히 완성하기 어렵습니다.
제게는 돌아갈 자리 따윈 없습니다. 경기도 적성도 제 고향이 아니며, 궁중에서 춤을 추는 일도 제 업이 아닙니다. 저는 두지 강가에서 홀로 깨어난 순간부터 어제와는 다른 오늘, 오늘과는 다른 내일을 만들며 살았습니다.
배가 센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들 밑으로 지나갈 때마다 고개를 들어 그 감춰진 다리의 밑바닥을 살폈던 것이다. 물과 바람, 또 다리 위로 지나가는 마차의 울림을 견디느라 다리 밑바닥은 때에 찌들고 상처투성이였다. 다리의 위와 옆은 멋진 조각과 문양을 새겨 넣었지만 배를 타고 지나갈 때만 겨우 볼 수 있는 밑바닥까진 미처 꾸미지 않은 것이다. 리심은 그 밑바닥을 확인하는 순간 센 강의 모든 다리를 사랑하게 되었다. 상처와 슬픔을 가장 어두운 곳에 감춰 두고, 그것들을 개로 꾸며 승화한 작품들만 때론 그림으로, 때론 음악으로, 때론 글로 보여주는 것이 곧 예술가가 아닐까. 리심은 그 못난 밑바닥들로부터 위로받고 안도했다.
아무리 끔찍한 불행이 찾아들더라도 내 춤과 노래를 꽃피우는 수단으로 삼으리라. 가장 어두운 곳에서 가장 화려한 생의 절정을 맛보리라.
파리의 조선 궁녀 라는 '리심'이란 타이틀 앞에 붙은 수식어에도 관심이 갔지만...
김탁환 이라는 저자 이름에서 확 끌려버린...
나,황진이 에 이어서 읽어볼만했던... 역사 인물에 관한 소설...
구한말...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시대를 살아간 여성을...
역시나 또... 아주 멋지게 살려놓았다...
조선일보에선 신경숙이 같은 인물을 소재로 연재소설을 쓰고 있다던데...
조만간 읽어볼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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