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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듣고/책장.넘기는.소리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편지 ... 그 책에서

네가 있는 곳에 왜 나는 없는가  1963. 5. 21

사람들이 재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좋구나, 어쩌면 어리석은 짓일지 모르지만, 그게 아니면 무슨 말을 하겠니, 사람들이 서로에게 달려가는 모습을 보면 좋고, 키스하고 우는 모습이 좋아, 초조함, 마음만큼 입에서 줄줄 쏟아지지 않는 이야기들, 그 이야기들을 다 담지 못하는 귀, 모든 변화를 다 잡아내지 못하는 눈을 보는 게 좋아, 포옹, 재회, 그리움의 끝이 좋아, 한쪽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공책에 쓰지, 이미 외우고 있는 비행 일정을 꼼꼼히 훑어보고, 관찰하고, 쓰는 거야, 잃고 싶지 않았으나 잃어버린 삶을 기억해 내지 않으려 애쓰지만, 기억해야 해, 여기 있으면 가슴 가득 기쁨이 차오른단다, 내 것이 아닌 기쁨일지라도,

'무(無)의 공간'

누구나 가끔씩 그냥 사라져버리고 싶을 때가 있잖니,

울고 싶었지만 울지는 않았어, 어쩌면 울었어야 할지도 몰라, 그방에서 우리 둘 다를 눈물 속에 익사시켜서, 우리의 고통에 종지부를 찍었어야 했다, 그렇게 했다면 우리는 이천 장의 백지 속에서 얼굴을 묻은 채 둥둥 뜬 모습으로, 아니면 내 눈물이 증발하고 남은 소금 밑에 묻힌 채 발견되었을 거야,

왜 도움을 청하지 않았을까, 왜 도움을 청하는 대신, 볼 수도 없으면서 그 많은 잡지와 신문들을 부탁했을까, 그것이 그녀 나름대로 도움을 청하는 방식이었을까?

어느 가을 오후 헛간 벽이 무너졌어 - "낙엽 한 장이 결정적이었어." 애나 아버지가 한 농담이었지 - 이튿날 그는 책꽂이를 가져다가 벽을 새로 만들었어, 그래서 책 자체가 안과 밖을 분리하게 됐어. (새로 얹은 지붕은 책이 비에 젖지 않도록 보호해 줬지만, 겨울에는 책장들이 얼어붙었다가, 봄이 오면 한숨 같은 소리를 내쉬었단다.) 그는 그 공간에 양탄자와 작은 소파 두 개를 갖다 놓고 응접실처럼 꾸몄어,
저녁이면 그곳에서 위스키 한 잔과 파이프 담배를 즐기며 책을 빼내 벽에 난 구멍으로 시내를 바라보기를 좋아했지.

그녀는 내가 자기를 사랑하는지 알고 싶어 한다, 누구나 다른 이로부터 바라는 것은 오로지 그것뿐이다, 사랑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랑이 존재한다는 인식,

우리가 살아야만 한다는 것은 치욕이야, 하지만 우리 삶이 단 한 번뿐이라는 것은 비극이란다, 인생을 두 번 살 수 있다면 한 번은 그녀와 함께 보냈을 텐데.

나는 살아갈 수가 없어, 노력해 봤지만 할 수가 없다. 그 말이 쉽게 들린다면, 산이 그저 산인 것이나 마찬가지야.
네 어머니도 고통스러워했다, 그러나 그녀는 살기를 선택했고, 살았어,


나의 감정들

나는 그에게 내 눈이 별로라고 말했어.   그가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랐거든.   우리는 아파트 안에서 그 안에 들어갈 수는 있어도 존재할 수는 없는 안전한 장소들을 만들었어.
그를 위해서라면 뭐든 다 했을 텐데.   어쩌면 그게 내 병이었는지도 몰라.

그의 마음속 어디에도 내가 없다는 것을 알았어.

나는 울기 시작했어.
그의 앞에서 울어보기는 처음이었어.   사랑을 나누고 싶었어.
나는 그에게 여러 해 전 우리가 처음으로 무의 공간을 만들었을 때부터 내가 알아야 했던 것을 물어봤어.
우리는 뭔가요?   존재인가요 무인가요?

나는 그가 표를 사려고 줄 서는 모습을 보았어.
생각했지, 대체 언제 그가 떠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할까?
그에게 어떻게 부탁할지 아니면 어떻게 얘기할지 그것도 아니면 어떻게 애원할지 알지 못했어.

난 갑자기 부끄러워졌단다.   부끄러워본 적은 별로 없었는데 말이야.   수치심을 느낀 적이야 많았지.   부끄러움은 자기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고개를 돌릴 때 느끼는 감정이지. 수치심은 원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고개를 돌릴 때 느끼는 감정이고,

나는 어떻게 하면 덜 느낄 수 있는지를 배우는 데 평생을 바쳤어.
날이 갈수록 느끼는 감정들이 줄어들었지.
이런 것이 늙어간다는 것일까?   아니면 늙는다는 건 뭔가 더 나쁜 것일까?
슬픔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려면, 행복으로부터도 자신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단다.

나는 그에게서 공책을 빼앗았어.   꼭 책이 울고 있는 것처럼 책장 위에서 눈물방울이 굴러 내리고 있었지.

당신이 나에게 상처 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 내게는 상처예요.   우는 얼굴을 보여주세요.
그난 손을 내렸어.   한쪽 뺨에 '예'가 거꾸로 찍혀 있었지.   또 한쪽 뺨에는 '아니요'가 거꾸로 찍혀 있었어.

나는 그의 몸에 손을 얹었어.   그를 만지는 건 항상 내게 아주 큰 의미가 있었지.   그건 내가 사는 이유였어.  이유는 결코 설명할 수 없었지만.   손끝을 살짝 대는, 아무것도 아닌 접촉이라도 좋았어.   그의 어깨에 손가락을 댄다든가.   같이 버스에 끼어 앉아 있을 때 허벅지 바깥쪽이 맞닿는다든가.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난 그런 접촉이 필요했어.   때때로 우리의 작은 접촉들을 꿰매 한데 이어놓는 상상을 해보았단다.   사랑을 나눌 때는 몇 번이나 서로의 손끝이 상대의 몸을 스칠까?   왜 누구나 사랑을 나누는 것일까?

아무도 이 문장을 가리키지는 않았지, 당신을 사랑해요.
그 주위에는 길이 없었어.   우리는 그것을 기어올라 넘을 수도 없었고, 끝이 나올 때까지 걸어갈 수도 없었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배우는 데 한평생이 걸렸다니 한스럽구나, 오스카.   다시 인생을 살 수 있다면 다르게 살 텐데.
내 삶을 바꿀 거야.
피아노 선생님에게 키스를 할 거야.   그가 비웃어도 좋아.
침대에서 메리와 함께 팔짝팔짝 뛸 거야.   바보 같다 해도 상관없어.
못생긴 사진들을 보내버릴 거야.   수천 장이라도.

순간들 사이의 빈틈으로 여러 해가 지나갔지.

그들에게 말했어.   가.
너희들 모두.
가.
그러자 그들은 갔단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어.


77년생이 썼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

이 책을 읽다 보면 초현실주의 화가가 되어 그림을 그리고 싶어진다.
책장 틈으로 시내를 바라보는 눈,
책장 위로 굴러내리는 눈물방울,
베개 밑으로 연결된 배수구,
가슴에 생긴 멍,
큰 호주머니에 담긴 지구,
끊어진 전화선 양쪽 수화기에서 한쪽은 알파벳을, 한쪽은 숫자를 뱉어내는 입,
다문 입 속에 가득한 단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