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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살이/대한민국에서 살아가기

우리 모두가 범인이다


당신과 대한민국  


"나라가 너에게 무엇을 해 줄까 묻지 말고, 네가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까를 물으라." 그러잖아도 우리는 늘 그렇게 살아왔으니, 케네디는 아마 대한민국이 부러울 게다. 당신은 미국의 대통령마저 부러워할 그 위대한 나라의 잘난 국민이다. 늘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물으며 살아온 애국적 당신에게 대한민국은 뭘 해줄 수 있을까?

당신이 이라크에 돈을 벌러 간다. 아니, 사우디아라비아를 여행하는 중일 수도 있다. 차를 타고 가다 운이 나빠 무장단체에게 사로잡힌다. 그들은 당신의 정부가 이라크 파병을 철회하지 않으면 당신을 죽이겠다며, 목에 칼을 들이댄다. 공포에 질린 당신은 온 몸으로 절규할 것이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한국군은 여기서 나가라."

협상 테이블에 나온 당신 정부의 손에 정작 당신의 목숨을 살릴 카드는 들려있지 않다. 파병을 철회하라는 그들의 요구에 대한민국은 신속하게 단호하게 대답한다. "파병 방침 변함없다." 절망에 빠진 당신은 울부짖을 것이다. "너희들의 목숨도 중요하지만, 나의 목숨도 중요하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힐끗 미국의 눈치를 본 후 다시 말할 것이다. "파병 방침 변함없다." 죽이려고 나온 건지, 살리려고 나온 건지...

'알자지라'에는 당신의 나라에서 제작한 방송이 나온다. 서희, 제마 부대의 화려한 활약상을 담은 감동적인 비디오다. 당신 나라 여당 의원의 인터뷰도 나온다. '오해하지 마라. 한국은 이라크의 친구다.' 외교부 장관의 인터뷰도 나온다. '민간인을 붙잡는 것은 야만이다. 인질들은 당장 석방되어야 한다.' 이제 당신은 절망에 빠진다. 그 시간, MBC 9시 뉴스에 따르면 파병반대를 외치는 것은 알 카에다의 속셈에 놀아나는 것이다.

당신의 부모는 울부짖는다. "한국군 철수하라." 이 절박한 호소에 동료 애국자들은 '그 심정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나 먼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묻는 애국적 자세는 아니"라고 느낀다. 당신의 형제는 부르짖는다. "이라크 파병 철회하라." 하지만 그 시간에 화염병 좋아하는 어느 여당 의원은 만두를 먹으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한 사람이 잡혀간다고 파병철회 하는 나라도 있나요?"

당신을 구할 유일한 카드는 파병철회뿐. 하지만 대한민국은 이 카드를 접어놓고 엉뚱한 짓이나 하며 당신을 구하려 애쓰고 있다는 '전방우' 인상이나 연출할 게다. 그 콘티에는 각하께서 친히 상황실에 나와 기웃거리는 감동적 장면도 포함된다. 신문과 방송에서는 파병철회를 안 하고도 당신을 구할 신통술이 있는 양 설레방을 떤다. 그래서 당신은 죽는다. 대체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정부는 테러를 비난한다. 부시는 이런 노(盧) 정권에 신뢰를 표명한다. 조중동은 파병원칙이 흔들리면 안 된다는 사설을 내보낸다. 한겨레와 오마이뉴스는 파병철회를 얘기하나, 탄핵 당한 대통령 구할 때만큼의 열정은 느껴지지 않는다. KBS는 국민의 분노를 테러리스트 쪽으로 일원화하고, 기계적 중립성을 싫어하는 MBC는 파병찬반의 기계적 중립성을 유지하는 곡예를 시작한다. 노란 인터넷 사이트에는 상심에 빠진 대통령을 걱정하는 글들이 줄줄이 올라온다.

당신이 아무리 살려달라고 애원해도, 당신을 도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게 당신의 조국 대한민국이고, 이게 당신의 동포 대한국민이다. 엽기는 또 있다. 토끼 몰이를 하듯이 조직적으로 당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그 자들이  이제 한 목소리로 당신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것. 얼마나 황당한가. 얼마나 얄미운가. 하지만 당신에게도 위안은 있다. 당신에게 떨어진 불운이 저들의 머리 위에도 공평하게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 그러니 편히 가시라.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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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와 연민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비극의 효과는 '공포와 연민'에 있다. 그리스 원어로 '공포'(phobos)는 '경악'에 가까운 강렬한 뜻이고, '연민'(eleos) 역시 남의 불행에 대한 동정 정도가 아니라, 파멸에 처한 남의 처지를 곧 자신의 처지로 느끼는 강력한 감정이입의 상태를 의미했다. 그리스 비극에서 잔인한 장면이 전령의 대사로 처리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토록 강렬한 감정상태를 야기하는 장면을 실연할 경우, 당시의 관객들은 그 심리적 쇼크 때문에 임상의학적으로 대단히 위험한 상태에 빠졌을 것이다.

어제 새벽에 한 사내가 텔레비전 화면에서 울부짖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물론 이런 종류의 사건이 처음 벌어진 것은 아니지만, 이번엔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왜 그랬을까? 화면의 사내가 나와 다르지 않은 외양을 한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아니면 미국의 인질들과 달리 몸뚱이 전체로 죽기 싫다고, 살고 싶다고 울부짖는 그 절규의 절실함 때문에? 어쨌든 그 장면을 보면서 그리스인들이 비극을 보며 느꼈다는 그 강렬한 '공포'와 '연민'의 실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너희 목숨도 중요하지만, 나의 목숨도 중요하다. 한국군은 여기서 나가라." 그 짧은 영어로 그가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너희들은 별 생각 없이 여기에 군대를 보낼지 모르나, 너희들도 내 처지가 되어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그리스인들이 '연민'이라 불렀던 그 강렬한 감정이입을 해보라는 것이다. 하지만 노무현 정권의 입장은 신속하고 단호했다. 우선적으로 안심시켜야 할 대상은 이 일로 자칫 낭패를 볼지도 모를 부시 정권. "추가 파병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

그 시간에 열린우리당의 유시민 의원은 만두 먹기 이벤트를 벌이고 있었다. 한 기자가 그에게 입장을 물었다. "한 사람 잡혀간다고 파병 철회하는 나라도 있나요?" 이 말을 듣고 나는 감정이입의 능력을 잃어버린 그를 대신하여 머릿속으로 역지사지의 사유실험을 하고 있었다. 저기에 잡혀 있는 저 사내가 유시민 의원이라면, 그는 과연 카메라 앞에서 무슨 말을 할까? 국정을 책임진 집권여당의 정치인답게 당당하게 외칠까? "각하, 한 시민 잡혀간다고 파병 철회하는 나라도 있습니까?"

황당한 것은, 납치된 이의 부모조차도 처음에는 이라크 파병에 찬성을 했었다는 사실. 제 자식이 잡혀가자 비로소 사태의 본질을 깨닫고 뒤늦게 파병반대를 외치고 나선 것이다. 어처구니없지만 어디 이게 그 분들만의 일이겠는가? 아마도 대한민국의 상당수가 자기가 직접 당하기 전까지는 '공포와 연민'의 감정이입을 못 할 게다. 파병으로 인해 초래되리라 예상되는 피해는 우리의 머릿속에는 늘 '나'의 것이 아니라 '남'의 것으로만 상정된다. 왜 그럴까?

우리는 그렇게 개개인의 생명을 존중하기보다는 국가라는 기계의 부분품이 되어 희생하도록 교육받아 왔다. 동료시민들과 서로 감정이입을 하기보다는 자신을 국가적 목표와 동일시하도록 길들여져 왔다. 과거에는 그렇게 하도록 '동원' 당했고, 이제는 그렇게 하도록 '참여' 당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이 빌어먹을 습속부터 뜯어고치지 않는 한, 아무리 그 형식이 민주적이어도 그 내실은 전체주의다.

군대를 안 보내면 우리 생명이 위협을 받는가? 군대를 보내서 우리 시민들의 안전이 보장되었는가? 이라크에 한국인 얼마나 된다고, 그 중 벌써 두 명이 살해당하고, 두 차례 납치사건이 벌어지고, 생각하기에도 끔찍한 처형까지 있었다. 이렇게 국민 개개인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을 나서서 저지르며, 심지어 그것을 '안보'라 부른다. 완전 변태들이다. '안보'라는 말로써 제 나라 시민의 생명보다 남의 나라 정권의 안위를 의미하는 나라. 이런 나라를 '조국'이라 불러야 하는 우리는 팔자 한번 더러운 국민이다.

(추기) 방금 김선일씨가 처형당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우리 모두가 범인이다.

 

written by 진중권




처음으로... 내가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것이 수치스럽고
처음으로... 내가 대한민국 정부에 한 표를 던졌다는 것이 후회스럽고
              (물론 그 한 표를 다른 편에 던졌어도 결과는 별반 다르지 않겠지만.)
처음으로... 이 나라를 떠나고싶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