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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랑

<가족의 탄생> 김태용 감독 인터뷰 중 ... 필름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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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드러나지 않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여러 관계들이 교차하고 그것이 결국 새로운 가족으로 귀결된다. 사실 ‘가족’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이들은 혈연관계의 짐에 구속되지 않는 것처럼도 보이고, 한편으로 강하게 속박되는 것처럼도 보인다. 다른 인물들은 어떻게 설정하게 되었는가?


이 영화에서 시간이란 단순히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흐름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캐릭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순차적으로 그냥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그 속에서 벌어지는 다른 관계의 형성과 변화들이 궁금했다. 첫 번째 아이디어에서 입양된 소녀가 성장해서 데려온 남자는 어떤 사람일까? 그 호기심 속에서 그 남자를 직접 대면하기보다는 그가 통과해온 시간과 관계망이 더 흥미로울 것 같았다. 그래서 그에 대한 여러 버전의 이야기를 만들어보았고, ‘그에게 만약 누나가 있다면’ 이라는 가정이 생겼다. 그렇다면 그 누나는, 그리고 그녀의 엄마는 어떤 사람이고 어떤 관계였을까 하는 것으로 나아간 것이다. 그러면서 처음 라디오에서 소개된 사연도 각색해, 한동안 집에 오지 않던 남동생이 불현듯 나이 많은 여자를 데려왔을 때, 이 관계가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용납될 수 있을까 싶었다.

가족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연애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대안가족 홍보영화처럼 돼버렸다(웃음). 연애라는 게 사랑에 관한 것이지만, 관계 그 자체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처음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마냥 설레고 들뜨고 행복해진다. 그런데 막상 손잡고 연애를 시작하려는 순간이 되면 그 감정들이 벌써 조금씩 달라진다. 욕심과 서로에 대한 불만들이 생긴다. 그런 과정들을 통해 그게 열정으로도 사랑으로도 발전하고 또 실패하기도 한다. 처음엔 마냥 좋았던 어떤 것이 나중엔 문제적 요소가 되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도 경석은 채현이 친절하기 때문에 매료된다. 그런데 결국 이들에겐 그 친절함이 갈등의 요인이 된다. 관계는 계속 변하고 그 관계가 어떻게 유지될 수 있을까하는 고민들이 있다. 그 안에서 연민이라는 감정이 생긴다. 이 감정은 서로 많은 시간과 경험을 공유해야만 생겨나는 것 같다. 결국 가족이라는 것도, 이들이 형성하는 대안가족의 느낌이라는 것도 그런 사랑과 연민 속에서 관계를 유지해나가는 게 아닐까 싶다.

모두 로케이션 촬영을 했다. 최근 많은 한국영화들이 세트장 안으로 들어가면서 ‘현실성’을 지워내고 지나치게 인위적이거나 과잉된 미장센들을 사용한다. 난 그게 불편하다. 반면 이 영화의 실제 공간들은 마치 진짜처럼 보이는 삶의 흔적이나 생기 같은 게 있다. 시간과 더불어 ‘있는 그 자체로의 공간들’은 이 영화의 큰 매력 중 하나다.

나도 세트 촬영이 주는 팬시한 느낌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다만 진짜 공간들을 영화를 담고 싶었다. 가령 첫 번째 에피소드에 나오는 집은 춘천에 있는 집이다. 누군가의 성장기 추억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을 것 같은 집. 어린 시절의 채현이가 미라에게 엄마 하고 쉽게 부르며 성큼성큼 들어왔던 집은 그녀가 어른이 돼서 남자친구와 함께 다시 찾아왔을 때에도 여전히 그 상태 그대로 있을 것 같았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오산의 미군기지 부근에서 촬영했다. 그런데 이 오산이라는 공간 자체가 굉장히 기이하다. 상권이 미군부대를 중심으로 형성돼 있고, 주변 아파트나 집들도 내부는 외국인 아파트처럼 돼 있다. 게다가 낮에는 어디서나 흔히 마주칠 것 같은 보통의 사람들, 학생들, 상인들이 오가는데 밤만 되면 미군을 상대로 몸을 파는 필리핀 젊은 여자들이 거리에 쫙 깔린다. 그 기괴한 국외적 정서가 정말 독특하다. 세 번째 에피소드는 채현과 경석이 춘천 집으로 향하는 로드 무비의 공간이다. 다리 위에서 손목시계의 알람이 울리는 곳은 춘천 가는 길에 있는 곳이다. 마치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이탈한 듯한 느낌이다. 처음 이들이 실타래로 장난하는 곳은 소양강변에 있는 다리인데, 거기 한 가운데 서 있는 동상이 ‘소양강 처녀 동상’이다. 진짜 이상한 동상이다(웃음). 그 기이함이 채현과 경석의 움직임과 더불어 마치 제3의 존재 같은, 약간은 초현실적으로 보이길 바랐다.

이 영화의 매력 중 하나는 굉장히 현실적인 장치들에 기반하고 누구나 공감할 만한 연애를 다루면서도 이 영화를 다 보고나면, 아 그게 판타지였구나 싶은 느낌이 있다. 시공간적 구조가 정교하게 얽혀 있고 독특한 느낌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봐줬다면 고맙다. 나도 드러내고 판타지를 표방하는 영화보다는 미묘한 정서나 감정이 있는 판타지가 좋다. 사실 각 에피소드 말미에 한 신씩 판타지를 넣은 것은 이 영화 전체를 그런 느낌으로 봐줬으면 하는 바람이 섞인 것이기도 하다. 좀 걱정되었던 것은 이 영화에 계산된 배치들이 있다는 점이다. 시간의 착시효과는 물론이고 공간의 대응이나 대사, 행위들 같은 부분에 있어서 지적으로 배치된 부분이 없지 않다. 그러면서도 그런 장치들이 너무 머리로 계산된 듯한 느낌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머리로 찍은 영화라기보다는 정서적으로 소통되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영화를 원한다.


정지연(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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