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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듣고/책장.넘기는.소리

역사는 발전하는가 ... 열하광인 / 김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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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광인 : 백탑파, 그 세번째 이야기 / 김탁환 / 민음사



지금 이 꼴로 살아내는 이유를 꼬집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백탑 서생들은 대부분 '벽(癖)'이나 '치(癡)'를 자처하며 미치광이로 하루하루를 살았다. 공부를 할 때도 미친 듯이 하고 벗을 사귈 때도 미친 듯이 하며 꽃을 기르고 새를 키울 때도 미친 듯이 했다.

나는 표창의 드러나지 않는 이 냉혹함이 좋다. ... 장검 대결에서는 검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기선을 제압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표창을 쓸때는 목숨이 위태로운 마지막 순간까지 소매 안에 살기를 감추고 기다려야 한다. 서둘러 뿌린 표창은 치명적이지도 않고 오히려 내가 지닌 두려움만 드러낸다. 최고의 방책은 표창을 뽑지 않고 대결을 끝내는 것이다. 보이는 장검보다 보이지 않는 표창이 때론 더 무섭다.

<열하>가 부러웠던 것은 문장과 문장이 걸쇠로 단단히 이어졌을 뿐만 아니라 가장 멀리 가장 높이 혹은 가장 색다르게 다음 문장으로 넘어간다는 점이다. 완벽하려면 보폭을 좁게 하고 호탕하려면 틈이 생기더라도 보촉을 멀리 두라 했건만, 이 서책은 보폭이 넓되 틈도 없다. <열하>를 읽기 전에는 나름대로 내 문장에 자신이 있었다. 명문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는 충분하다 여꼈다. 그러나 이 책은 문장에 대한 내 생각을 온통 흔들어 버렸다. 문장은 단순히 글자들의 합이 아니었다. 문장은 지은이의 뜻을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었다. 문장은 즐겨 외우며 내 삶에 적용시키는 거울이 아니었다. 문장은 놀라운 변신 그 자체였다. 나무가 그냥 서 있을 때는 나무였지만, 강으로 첨벙 뛰어들자 배가 되었고 구르니 바퀴가 되었으며 타오르니 횃물이 되었다. 잠시도 쉬지 않고 변신의 극한을 보여주는 문장이야말로 참 문장이다. 이 책은 그런 문장들로 넘쳐 났고 나는 그 앞에서 내 문장을 잊었다.

내가 가장 아끼는 소리는, 어떤 이들은 그것도 소리냐고 비웃지만 분명 내 귀에는 똑똑히 들리는 소리는, 글자를 쓰는 붓 소리다. 점을 찍을 때 획을 내리그을 때 둥글게 감아 올릴 때 붓이 내는 소리는 모두 다르다. 서책을 펴 먼저 서체부터 살핀다. 글자 위로 붓이, 그 붓을 잡은 손이, 그 손을 바라보는 눈이 하나가 되어 움직인다. 필사의 즐거움은 단순히 멋지고 아름다운 글을 옮겨 적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나는 글자의 의미를 새기기에 앞서 종이를 메워 나가는 붓 소리를 듣는다. 비 그친 하늘을 낮게 나는 제비처럼 날렵한 소리도 있고 바위로 누르는 무거운 소리도 있다. 이덕무처럼 작디작지만 맵시 있는 소리도 있고 박지원처럼 호방하고 거칠지만 짚을 건 다 짚는 소리도 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산을 오르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이고 물을 건너는 것은 물을 건너는 것이다. 산과 물에 진리가 담기지 않았고 산수를 노니는 순간마다 깨달음에 무릎을 칠 이유도 없다. 양한 문장에 비둘기를 가려 살핀 예가 없다 하여 구별하는 일 자체를 접는 것은 멀쩡한 두눈 놔두고 맹인이 되겠다 자처하는 짓이다.

"시력을 점점 잃어 가니 어둠과 친해진다네. 또한 빛과 어둠 사이에 걸쳐 있는 수많은 세상들도 새로 만나지. 눈이 멀쩡할 때는 이것이든지 이것이 아니든지 둘 중 하나였다네. 바위이거나 바위가 아니거나 참새거나 참새가 아니거나! 한데 그 둘 사이에도 수많은 세상이 숨었더군. 아니 숨은 적은 없지만 애써 찾지는 않았단 것이 정확한 말이네. ... 언젠가 청장관 형님이 탕약에 보글보글 일어난 수천의 거품을 보며 각기 다른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는 멋진 말을 하셨지. 정말 그래. 세상은 하나가 아니지. 눈만 잃어도, 탕약 속 거품만 뚫어지게 살펴도."
세상은 또한 도성에도 있고 부여에도 있다. 박제가의 세상도 있고 나 이명방의 세상도 있고 용상의 주인이 파악하는 세상도 역시 있다. 나의 세상과 너의 세상이 다름을 인정하고 오순도순 살기란...... 말처럼 간단하지 않다.

속언에 중이 나오는 꿈을 꾸었는데 문둥이가 되었다는 말이 있지. 생각이 생각을 낳고 그 생각이 또 생각을 낳아 엉뚱한 결론에 도달한다네.

"시간을 들여 원하는 풀이나 꽃 아래 드러누우면 돼. 그냥 누워서 졸라는 건 아니고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꼼꼼하게 풀이나 꽃을 관찰하는 거지. 한참 들여다보고 있으면 잎이며 줄기들이 제각각 새롭게 보여. 남들은 알지 못하는 특징들이 드러나거든."

지난 가을 각자 이 세상을 어떻게 하직하고 싶은지 의논이 붙었을 때, 이덕무는 서책을 읽다가 서안에 이마를 박은 채 죽으리라 했다.

모름지기 자기 반성이란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몸조심하라거나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쯤 적혀 있을 법도 하지만 이 한 문장이 전부다. 청장관에게 시문을 배운 탓일까. 서책을 읽거나 쓰지 않는 곳에서도 생략과 여운을 즐겼다. 말로 할 필요가 없는 일은 하지 않았고 말로 할 필요가 있는 일도 다른 것들로, 예를 들어 손짓이나 눈짓 혹은 어깨짓으로 바꾸었다.

하룻밤 이별이든 평생 이별이든, 뒤돌아서서 흐릿하게 멀어지는 등짝은 하나같이 쓸쓸했다. 사건이 완결되고 가해자나 피해자와 다시 만나지 않게 된 후에도, 나는 종종 그들의 등을 떠올리곤 했다. 애기 등부터 늙은이 등까지, 분노하는 등에서 슬퍼하는 등까지, 다양한 등에 내 삶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앞모습을, 얼굴을, 눈동자를 보면, 어색한 몸짓과 함께 몇 마디 인사말이라도 건네야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등이다. 내 시선만이 머무는, 아무리 오래 어루만져도 말을 걸지 않는 조용한 등!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나를 감싸고도는 침묵이었다. 이 망할 놈의 침묵은 많은 이야기를 품었다.

"망각은 참으로 무섭지. 주의해서 살피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대부분 현재의 모습으로 과거를 덮어쒸운다네. 내가 지은 시문이 젊은 서생에게 읽히니 이런저런 말들이 날 만도 하겠지. 하나 내가 과장을 뛰져나왔을 때는 전혀 달랐다네. 자넨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육중한 고민이 어깨를 짓눌렀지. 그것들을 편담(扁擔)처럼 지고 가려면 등용문이 너무 좁았네. 나는 과장에서 물러난 서생이 아니라 등용문이 아닌 문을 찾아 헤맨 최초의 서생으로 기억되고 싶네."

고문이 그 시절의 금문이었다 하여 지금 쓰는 금문도 곧 고문만큼 가치가 있다 우겨서는 아니 되느니라. 고문은 망각의 세월과 맞서 싸워 살아남았느니, 한 글자 한 구절도 보태거나 지우지 못하는 이유는 그만큼 갈고 닦여 완전해졌기 때문이니라.

비록 야뇌 선생처럼 나서지는 않았으되 당신 가슴에 아로새긴 상처들에게 말을 할 기회를 주세요. 당신이 매설을 짓겠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때, 특히 <임진록>에서 얼마나 승전이 과장되고 패전은 축소되었는가를 조목조목 열거할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답니다. 매설이란 상처가 많은 사람이 그 상처를 위로하기 위해 짓는 것이구나. 상처가 클수록 허탄한 이야기도 많아지겠지만 그것 또한 상처를 열심히 치료하겠다는 의지이기도 하겠구나.

늙고 병드니 성정에 반하는 세 가지 일이 내게도 닥쳤다. 슬퍼도 눈물이 흐르지 않는 일과 밤에 잠이 없는 일과 최근 일을 잊는 일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 웃을 때 눈물이 나오며 낮에 잠이 많고 젊은 날의 일들이 더욱 또렷하게 떠오른다.



드디어 백탑파 시리즈를 다 읽었다.
정조와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홍대용 ...
그들이 좀 더 오래 살았다면 세상은 달라졌을까?

역사의 큰 틀은 어느날 갑자기 몇명의 사람들에 의해 확 바뀔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특별히 똑똑하거나 특별히 지혜롭지는 않지만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는 일반 대중에 의해
서서히 그것이 거의 느낄 수 없을 만큼의 미동이라 하여도
그렇게 조금씩 바뀌게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것이 그들이 꾸었던 꿈과 다르지 않고, 그후로도 세상은 변화하기만 했다하더라도,
그렇게 보편적 가치를 찾고 그것을 지향해야 한다고 믿는다.

백탑파 시리즈를 읽으며 가장 반가웠던 건
정민 선생님의 미쳐야 미친다에서 보았던 화광 김군, 간서치 이덕무, 박제가, 박지원, 홍대용 등...
조선시대 지식인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는 것.

"저는 세상과 담을 쌓고 제가 만든 이야기 속에서만 위로 받는 매설가는 되지 않으렵니다. ... 저는 최선을 다하여 이 세상이 지금보다 더 나아지도록 독자를 이끌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만드는 이야기의 안과 밖이 차별 없이 만났으면 합니다."
라는 책의 화자 이명방의 말은 김탁환 선생님의 목소리가 아니었을까.


책 속에서 지금은 익숙하지 않은 우리말을 찾아서 응용하시고,
각주까지 친절히 달아주신 것도 좋았다.
그 말들을 보고 있으면, <사라진 목소리들>에서 읽었던 것처럼
우리도 지난 한 세기의 역사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이 참 많구나란 생각이 든다.
다시 찾아서 써 버릇 해야할텐데...
이렇게 다시 옮겨적어보면서 기억해보려 애쓴다.

누리 : 우박
솔포기 : 가지가 다보록하게 퍼진 작은 소나무
고임성 : 남의 눈에 들게 하는 성미나 기질
미립나다 : 경험을 통하여 묘한 이치나 요령이 생기다
맨드리 : 옷을 입고 매만진 맵시
망년교(忘年交) : 나이를 잊고 사귐
든손 : 서슴지 않고 얼른 하는 동작
벽어(壁魚) : 책벌레
적바림하다 : 나중에 참고하기 위하여 간단히 적어 두다
너덜겅 : 돌이 많이 흩어져 있는 비탈
거탈수작 : 실속 없이 겉으로 주고받는 말
이내 : 해질 무렵 멀리 보이는 푸르스름하고 흐릿한 기운
왼새끼를 꼬다 : 일이 꼬여 어떻게 될지 몰라 애를 태우다. 심히 우려하거나 조심하여 말하고 행동하다
벋놓다 : 잠을 자야할 때에 자지 아니하고 그대로 지나가다
건밤 : 잠을 이루지 못하고 뜬눈으로 새우는 밤
바라지 : 방에 햇빛을 들게 하려고 벽 위쪽에 낸 작은 창
중동무이 : 하던 일이나 말을 끝내지 못하고 중간에서 흐지부지 그만두거나 끊어 버리다
꽃달임 : 진달래꽃이 필 때 그 꽃을 따서 전을 부치거나 떡에 넣어 여럿이 모여 먹는 놀이
장맞이 : 길목을 지키고 기다리다가 사람을 만나려는 것
전기수 : 고전 소설을 낭독하여 들려주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
감투밥 : 그릇 위까지 수북하게 담은 밥
민주고주 : 지긋지긋하도록 귀찮은 일
아퀴를 짓다 : 일의 가부를 결정하다
앞짧은소리 : 하지도 못할 일을 하겠다고 미리 장담하는 일
어진혼이 나가다 : 몹시 놀라거나 시끄러워서 정신을 잃다
윷진아비 : 내기나 경쟁에서 자꾸 지면서도 다시 하자고 달려드는 사람을 비유하는 표현
겉잠 : 깊이 들지 않는 잠. 수잠. 여윈잠
시위잠 : 활시위 모양으로 웅크리고 자는 잠
밤눈 어두운 말이 워낭 소리 듣고 따라간다 : 밤눈이 어두은 말이 자기 턱밑에 달린 쇠고리의 소리를 듣고 따라간다는
       뜻으로, 맹목적으로 남이 하는 대로 따라 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끼끗하다 : 생기가 있고 깨끗하다
여우볕 : 궂은 날 잠깐 났다가 숨어 버리는 볕


그나저나,
리상호 역의 <열하일기>는 언제 읽나... -_-